VR과 AI로 만나는 인권의 얼굴들…KF XR 갤러리 기획전 개막

김아영(Ayoung Kim), ‘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Porosity Valley, Portable Holes)’, 2017, 단채널 영상, 컬러, 사운드, 21분 20초, 서울시립미술관 소장작(이미지=서울시립미술관)

한국국제교류재단(KF)이 인권이라는 오래된 보편 가치를 가장 동시대적인 매체로 끌어왔다. KF는 기획전 ‘마주하는 얼굴들(Facing Faces)’을 통해 자유와 평화, 이주, 경계, 디지털 권리 같은 의제를 XR 기술로 풀어내며, 관람객이 인권 문제를 단순히 ‘이해’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몸으로 ‘마주하도록’ 설계했다. 전시는 7월 31일까지 서울 중구 을지로 KF XR 갤러리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가 눈에 띄는 이유는 인권을 선언문이나 기록물의 언어가 아니라 체험의 언어로 번역했다는 데 있다. KF XR 갤러리는 디지털 신기술 기반 실감형 콘텐츠를 통해 세계와의 소통과 교류를 넓히기 위해 운영되는 공간인데, 그 성격상 추상적인 국제 담론을 관람자가 직접 감각하도록 만드는 데 강점이 있다. 이번 ‘마주하는 얼굴들’은 바로 그 공간의 성격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인권을 멀리 있는 이슈가 아니라, 지금 내 앞에 놓인 얼굴과 상황으로 호출하겠다는 의도가 분명하다.
전시는 크게 LED 미디어월 존, 가상현실 체험 존, AI 기반 인터랙티브 작업 등으로 구성된다. 단순히 첨단 기술을 전시장에 들여놓는 수준이 아니라, 기술이 관람 방식 자체를 바꾸도록 짜여 있다. 평면 영상이나 텍스트 패널로는 지나치기 쉬운 문제를, 시야를 둘러싸는 화면과 VR 환경, 상호작용형 인터페이스로 전환함으로써 인권 문제를 더 직접적이고 감각적인 질문으로 바꾸는 방식이다.
해외 협업작 가운데 주목할 작품은 주한캐나다대사관과 함께 선보이는 도미닉 데자르댕과 샤를로트 브루노의 VR 작품 ‘인형의 집’이다. 이 작품은 이주민 가사노동자의 인권 문제를 아동의 시선으로 다루며, 칸영화제 XR 부문 초청작으로도 소개됐다. 관람객은 단순히 타인의 사연을 듣는 입장을 넘어, 구조적 불평등과 돌봄 노동의 현실이 어떻게 한 개인의 삶 속으로 스며드는지를 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하게 된다.
보리스 하르스-차호틴의 ‘점프!’는 또 다른 축을 맡는다. 베를린 장벽을 넘는 동독 경비원의 실제 역사적 장면을 바탕으로 한 이 작업은 자유와 평화가 추상적 이념이 아니라, 특정 순간의 결단과 위험 위에 놓인 가치임을 환기한다. 냉전의 기억을 다룬 역사적 소재가 XR 환경 안에서 재구성될 때, 관람객은 기록된 과거를 관조하는 대신 그 긴장에 더 가까이 접근하게 된다.
국내 참여 작가들의 면면도 이번 전시의 밀도를 높인다. 김아영, 전소정, 정연두 등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디지털 권리, 경계, 소수자 서사 같은 문제를 다루고, 민세희와 디폴트의 신작은 ‘신기술과 인권’이라는 보다 동시대적인 의제를 전면으로 끌어낸다. 특히 민세희의 ‘전자 인격’은 디지털 존재에게 어디까지 윤리와 권리를 상정할 수 있는지를 묻는 작업으로 소개돼, AI 시대 인권의 범위가 인간 바깥으로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를 사유하게 만든다.
이 지점에서 ‘마주하는 얼굴들’은 단순한 테크 전시와 분명히 갈라진다. 많은 실감형 전시가 기술적 신기함 자체를 전면에 내세운다면, 이번 전시는 기술을 어디까지나 질문을 더 날카롭게 만드는 도구로 쓴다. 관람 포인트는 “얼마나 새로운 장비인가”가 아니라 “그 장비가 어떤 윤리적 감각을 깨우는가”에 있다. 즉 XR은 장식이 아니라 매개이고, 전시의 진짜 중심은 기술이 아니라 인간 존엄과 공존의 문제다. 이 평가는 전시 구성과 KF의 공간 운영 취지를 종합한 해석이다.
KF가 이런 전시를 선보인 배경도 주목할 만하다. KF XR 갤러리는 공공외교 성격의 전시 공간으로, 각국 문화와 보편 가치를 디지털 콘텐츠로 연결하는 역할을 해왔다. 과거 환경, 인간성, 문화 교류 등을 주제로 한 전시를 이어온 흐름 속에서, 이번 인권전은 기술 기반 공공외교가 어디까지 사회적 의제를 다룰 수 있는지 보여주는 확장판에 가깝다. 인권을 미술관 안의 주제로만 머물게 하지 않고 국제 교류와 시민 감수성의 문제로 연결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인권은 과연 얼마나 가까이 와 있어야 비로소 체감되는가. 전쟁과 장벽, 이주와 소수자, 데이터와 AI 윤리까지 서로 다른 문제들이 한 공간에 모이는 이유는, 그 모든 의제가 결국 타인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하는 일과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는 기술이 차갑고 비인간적인 것이라는 익숙한 선입견을 비틀며, 오히려 기술을 통해 인간의 권리와 존엄을 더 생생하게 사유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무료 관람이라는 점도 이런 문제의식을 더 넓은 관객에게 열어두는 선택으로 읽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