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고전극장]인톨러런스,영화가 스스로의 문법을 발명하던 순간

Intolerance (인톨러런스)

Intolerance (인톨러런스)

영화사의 초창기를 대표하는 작품 가운데서도 D.W. 그리피스의 인톨러런스(1916) 는 유난히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것은 이 영화가 단지 “오래된 걸작”이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이 작품은 영화라는 매체가 아직 자기 자신이 무엇이 될 수 있는지 완전히 알지 못하던 시절, 그 불확실성 자체를 에너지로 바꾸며 한계 바깥으로 질주한 드문 사례에 가깝다. 그래서 인톨러런스를 본다는 일은 고전을 감상하는 차원을 넘어, 영화가 어떻게 자신의 언어를 만들어 갔는지를 목격하는 경험이 된다.

이 작품의 야심은 구조에서부터 드러난다. 영화는 하나의 이야기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 고대 바빌론의 몰락, 그리스도 시대,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 전후의 프랑스, 그리고 20세기 초 미국 사회를 배경으로 한 현대극이 교차한다. 각기 다른 시대와 문명, 종교와 계급, 사랑과 폭력의 장면들은 처음에는 서로 쉽게 포개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질적이고 산만하다. 그러나 그리피스는 바로 그 산만함을 통해 하나의 거대한 명제를 밀어붙인다. 시대가 아무리 달라져도 인간은 늘 비슷한 방식으로 타인을 심판하고, 배제하고, 파괴해 왔다는 것. 제목 그대로 불관용은 어떤 특정 시대의 병리가 아니라 문명이 반복해서 재연해 온 인간적 습성이다.

인톨러런스의 진정한 위대함은 이 주제를 설명하는 방식에 있다. 이 영화는 불관용을 논증하지 않는다. 설교하는 순간조차 있지만, 결정적인 것은 메시지의 선포가 아니라 형식의 작동이다. 서로 다른 시대의 비극이 병렬적으로 이어지고, 다시 더 촘촘하게 काट리고, 마침내 거의 경련적인 리듬으로 교차될 때, 관객은 하나의 사상을 머리로 이해하기보다 신경으로 체험하게 된다. 이 영화에서 편집은 단순한 연결 수단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을 압축하고 감정을 증폭하며, 반복되는 인간 폭력의 구조를 눈앞에서 가시화하는 핵심 장치다. 오늘날 교차편집은 너무 익숙한 문법이 되었지만, 인톨러런스에서 그것은 아직 굳어지지 않은 기술이 아니라 거의 세계관에 가까운 형식적 발명으로 보인다.

특히 후반부는 이 영화가 왜 영화사에서 하나의 분수령으로 남았는지를 웅변한다. 각각의 이야기에서 위기가 고조되고, 구조와 탈출, 파멸과 죽음의 가능성이 동시에 달려올 때, 영화는 서사의 순서를 따르지 않고 감정의 속도를 택한다. 시간은 더 이상 직선으로 흐르지 않는다. 대신 여러 시대의 긴박함이 한 덩어리의 현재로 응축된다. 이때 스크린 위에서 벌어지는 것은 단순한 사건의 병치가 아니다. 문명은 서로 다르지만 공포는 닮아 있고, 인간은 시대를 달리해도 같은 잔혹함을 반복한다는 사실이, 서사의 논리 이전에 리듬의 충돌로 각인된다. 말하자면 인톨러런스는 “무엇을 보여주는가” 이전에 “어떻게 보여주는가”로 스스로를 위대한 작품의 반열에 올려놓는다.

시각적 규모 역시 압도적이다. 무엇보다 바빌론 에피소드는 초기 영화가 도달한 스펙터클의 극점처럼 보인다. 거대한 성벽과 계단, 화면 깊숙이 밀려드는 군중, 수직으로 치솟는 건축적 구도는 단순한 볼거리를 넘어선다. 그것은 인간 문명이 자신의 위엄을 과시하는 동시에, 바로 그 거대함 속에 몰락의 전조를 품고 있음을 보여준다. 인톨러런스의 미장센은 종종 과시적이지만, 그 과시는 텅 빈 허세가 아니다. 거대한 세트는 인간이 만든 질서의 규모를 말하는 동시에, 그 질서가 얼마나 쉽게 광신과 हिं력 아래 무너질 수 있는지를 드러낸다. 웅장함이 곧 허망함의 다른 이름이 되는 순간, 이 영화는 스펙터클을 의미로 전환한다.

물론 오늘의 시선에서 보면 인톨러런스는 완전히 매끄러운 작품이 아니다. 네 개의 서사는 주제적으로 묶일 뿐 극적으로 완전히 한 몸이 되지는 못하고, 인물들은 때로 사상의 전달을 위해 기능하는 기호처럼 보이기도 한다. 감정선이 무르익으려는 순간 다른 시대로 넘어가는 전개는 몰입을 끊기도 하며, 메시지는 여러 대목에서 노골적이다. 어떤 장면은 위대한 발명 직전의 투박함을 숨기지 못한다. 그러나 이 영화의 가치는 바로 그 미완의 거대함에 있다. 인톨러런스는 완벽하게 다듬어진 걸작이라기보다, 예술 형식이 자기 확장의 순간에 내뿜는 과잉의 기록이다. 정제된 아름다움보다 더 강하게 다가오는 것은, 영화라는 매체가 자기 가능성을 처음으로 거칠고도 대담하게 시험하는 현장의 열기다.

이 작품을 오늘 다시 봐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톨러런스는 단순히 “영화사적으로 중요한 작품”이 아니다. 그런 식의 평가는 때로 감상의 생기를 죽인다. 실제로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우리는 교과서의 문장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가 시간과 공간, 감정과 사상을 어떻게 조직할 수 있는지에 대한 원초적 충격과 마주하게 된다. 이 영화는 아직 세련되지 않았지만 이미 거대하고, 아직 불완전하지만 이미 대담하다. 그리고 바로 그 불완전한 대담함 속에서, 이후 수많은 영화가 기대 서게 될 문법의 뼈대가 태어난다.

결국 인톨러런스는 하나의 드라마라기보다 하나의 선언이다. 영화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수단에 머무르지 않고, 서로 다른 시대와 정서를 병치하고 충돌시키며 인간 문명 전체를 사유할 수 있는 형식이 될 수 있다는 선언. 그리피스의 영화는 낡았고, 때로 과장돼 있으며, 분명히 역사적 거리감을 요구한다. 그럼에도 그것은 여전히 살아 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지금도 우리에게 어떤 감각적 충격을 주고, 영화라는 예술이 무엇이었고 또 무엇이 될 수 있는지를 다시 묻게 만든다는 뜻이다. 인톨러런스는 바로 그런 의미에서 오래된 걸작이 아니라, 아직 끝나지 않은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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