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골문이 들려준 잔혹한 진실…상나라 은허에 묻힌 ‘죽음의 정치학’

갑골문이 들려준 잔혹한 진실…상나라 은허에 묻힌 ‘죽음의 정치학’[c]파르트
중국 고대사에서 상나라는 오랫동안 전설과 역사 사이에 놓여 있었다. 문헌 속에는 분명 왕조의 이름이 남아 있었지만, 그것이 실제로 존재한 국가였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20세기 초 갑골문자가 상나라의 문자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1928년부터 마지막 수도였던 은허 유적 발굴이 본격화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신화처럼 보이던 왕조는 땅속에서 나온 뼈와 청동기, 무덤과 제사 흔적을 통해 역사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은허가 보여준 상나라의 얼굴은 화려한 청동기 문명만이 아니었다. 그곳에는 고도로 발달한 왕권과 제사 체계, 문자 문화가 있었지만 동시에 대규모 인신 공양의 흔적도 함께 묻혀 있었다. 은허에서 발견된 유골 가운데 상당수는 자연사한 뒤 장례 절차에 따라 묻힌 사람이 아니었다. 목이 잘리거나, 몸이 훼손되거나, 의도적으로 살해된 뒤 제의 공간이나 무덤 주변에 묻힌 사람들이었다.
상나라의 인신 공양은 단순한 순장과도 달랐다. 순장은 왕이나 귀족이 죽은 뒤 생전에 거느리던 사람들을 함께 묻는 장례 풍습에 가깝다. 그러나 은허에서 확인되는 희생은 살아 있는 사람을 제사의 일부로 죽여 신이나 조상에게 바치는 행위였다. 풍년을 빌기 위해, 재앙을 막기 위해, 비가 그치기를 바라며, 혹은 왕실의 안녕을 위해 사람의 생명이 제물로 사용됐다.
이 사실을 더욱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이 갑골문이다. 갑골문은 거북의 배딱지나 동물의 뼈에 새긴 문자로, 상나라 왕실이 점을 칠 때 사용했다. 왕은 전쟁을 해도 되는지, 비가 올지, 제사를 어떻게 지낼지, 사냥에 나서도 좋은지 등을 묻고 그 결과를 기록했다. 놀라운 점은 그 질문들 가운데 사람을 몇 명 바쳐야 하는지를 묻는 내용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한두 명이 아니라 수십 명, 때로는 수백 명 단위의 희생이 언급된다.
희생자의 상당수는 전쟁포로였던 것으로 보인다. 상나라는 주변 세력과 끊임없이 충돌했고, 정복 전쟁을 통해 포로를 확보했다. 포로는 노동력으로 쓰이기도 했지만, 제사의 제물로 바쳐지기도 했다. 이는 단순한 잔혹 행위가 아니라 국가 운영의 일부였다. 전쟁에서 이긴 왕은 포로를 데려왔고, 그 포로를 조상신이나 자연신에게 바침으로써 자신의 권위와 전쟁의 정당성을 다시 확인했다.
여기서 고대 국가의 무서운 논리가 드러난다. 전쟁은 포로를 만들고, 포로는 제사의 재료가 되며, 제사는 왕권을 강화한다. 왕권은 다시 더 큰 전쟁을 명령한다. 폭력이 종교와 정치, 군사 시스템 속에서 순환하는 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상나라 사람들에게 이런 의식은 야만적 취미가 아니라 세계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이해됐을 가능성이 크다. 비가 오지 않으면 제사를 지내야 했고, 재앙이 닥치면 더 큰 희생이 필요하다고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문명의 수준이 높다고 해서 인간에 대한 감각까지 함께 성숙하는 것은 아니다. 은허의 청동기는 정교하고, 갑골문은 체계적이며, 왕실 제사는 치밀했다. 그러나 그 정교함은 때로 인간의 생명을 더 효율적으로 다루는 장치가 되었다. 고도로 조직된 사회일수록 폭력은 우발적 광기가 아니라 제도와 의례의 이름으로 안정적으로 반복될 수 있다.
상나라 후기에 정복 전쟁이 줄어들면서 대규모 전쟁포로 희생도 감소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폭력의 습관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전쟁터에서 끌려온 타인이 줄어들자, 일상 속에서 부리던 노비나 하층민이 제물로 사용되는 관습이 퍼졌다는 해석도 있다. 바깥의 적을 향하던 폭력이 안쪽의 약자에게 옮겨간 셈이다.
이 대목은 고대사를 오늘의 이야기로 끌어온다. 폭력은 처음에는 늘 ‘필요’의 언어를 입고 등장한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신의 뜻을 얻기 위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해 누군가의 희생이 요구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 번 타인의 고통을 도구로 쓰기 시작하면, 그 기준은 점점 낮아진다. 처음에는 적에게만 향하던 폭력이 다음에는 포로에게, 그다음에는 노비에게, 결국에는 공동체 내부의 약자에게 향한다.
상나라 마지막 왕 주왕과 달기에 얽힌 잔혹한 전설도 이런 역사적 기억과 무관하지 않다. 후대의 기록에는 달기가 사람을 고문하고 죽이는 일을 즐겼다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물론 전설은 과장되고 정치적으로 덧칠되기 마련이다. 새 왕조가 이전 왕조를 무너뜨린 뒤, 옛 왕조를 악마화하는 서사는 흔하다. 그럼에도 그런 전설이 완전히 허공에서 생겨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사람의 생명을 제사와 권력의 재료로 삼던 사회의 기억이 ‘잔혹한 왕과 악녀’의 이미지로 응축됐을 가능성이 있다.
은허의 유골과 갑골문은 고대 문명의 양면성을 동시에 보여준다. 문자는 역사를 남겼고, 청동기는 기술의 정점을 보여줬으며, 도시와 궁전은 국가의 힘을 증명했다. 그러나 그 문자는 사람을 몇 명 바칠지 묻는 데도 쓰였고, 그 국가는 타인의 죽음을 질서의 일부로 편입했다. 문명은 반드시 선을 의미하지 않는다. 문명은 인간이 무엇을 더 정교하게 할 수 있게 되었는지를 보여줄 뿐이다. 그 정교함이 예술과 제도가 될 수도 있고, 폭력과 지배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은허는 단순한 고고학 유적이 아니다. 그곳은 인간이 힘을 가졌을 때 어디까지 무감각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왕은 신에게 묻는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권력이 자기 욕망을 정당화하는 언어를 만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제사는 신성한 의식처럼 보였지만, 그 안에는 약자의 목숨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다는 오만이 숨어 있었다.
역사는 자주 승자의 기록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은허에서는 말 없는 유골들이 승자의 기록에 균열을 낸다. 왕의 이름과 제사의 절차는 갑골문에 새겨졌지만, 희생자의 이름은 대부분 남지 않았다. 그들은 ‘몇 명’이라는 숫자로만 기록됐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땅속에서 다시 드러난 뼈는 묻는다. 국가의 영광은 누구의 죽음 위에 세워졌는가. 문명의 찬란함은 누구의 침묵을 대가로 얻어진 것인가.
오늘날 우리는 인신 공양을 먼 고대의 야만으로 여긴다. 그러나 타인의 고통을 필요한 비용으로 계산하는 사고방식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전쟁에서 민간인의 희생을 부수적 피해라고 부르고, 노동 현장의 죽음을 불가피한 사고로 처리하며, 약자의 고통을 사회 발전의 대가로 넘겨버릴 때 우리는 다른 방식의 제단을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을 직접 제물로 바치지 않을 뿐, 누군가의 고통을 숫자로 환산하는 습관은 여전히 살아 있다.
은허에서 발견된 죽음은 그래서 오래된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향한 경고다. 힘을 가진 집단이 타인의 고통에 둔감해질 때, 문명은 쉽게 야만으로 기울어진다. 권력이 스스로를 신성하다고 믿는 순간, 약자의 생명은 제물로 바뀐다. 고대 상나라의 제단 위에 놓였던 것은 포로와 노비의 몸이었지만, 그 뒤에 놓여 있던 것은 인간을 수단으로 보는 사고방식이었다.
은허의 갑골문은 3000년 넘은 목소리다. 그 목소리는 풍년과 전쟁과 제사를 묻고 있지만, 오늘의 우리에게는 다른 질문으로 들린다. 우리는 지금 누구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가. 누구의 고통을 공동체의 안녕이라는 이름으로 지워버리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가 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과연 인간을 더 존엄하게 만들고 있는가.
상나라의 수도 은허는 폐허가 되었지만, 그곳에서 나온 질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불편한 교훈은 인간이 과거보다 늘 나아졌다고 장담할 수 없다는 점이다. 제단의 모양은 바뀌고, 제사의 언어는 사라졌지만, 힘이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게 만든다는 사실은 여전히 반복된다. 은허의 죽음이 오래도록 섬뜩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