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홀로코스트의 기억은 면죄부가 될 수 없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홀로코스트 추모일에 유럽을 향해 “도덕적 취약성”을 비난하고, 이스라엘이 “세계를 지키고 있다”고 말한 장면은 강경 발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홀로코스트의 교훈을 경계와 성찰의 언어로 사용하는 데서 더 나아가, 현재의 전쟁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하는 정치적 수사로 끌어다 쓴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란의 핵시설을 미래의 “아우슈비츠”가 될 수 있었다고까지 비유했는데, 이런 언어는 현재의 군사행동을 하나의 정책 선택이 아니라 역사의 의무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더 단호해져야 한다. 어떤 역사적 비극도, 어떤 집단의 실존적 공포도, 현재의 인권침해를 면책하는 논리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보편적 인권의 출발점은 간단하다. 유대인의 생명은 절대적 가치이고, 팔레스타인인의 생명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2023년 10월 7일 하마스와 다른 무장세력이 민간인을 살해하고 인질을 납치한 행위는 명백한 범죄이며 어떤 정치적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국제사법재판소(ICJ)도 가자 사태를 다루며 그 즉각적 맥락으로 이 공격과 1,200명 이상이 숨지고 약 240명이 납치된 사실을 분명히 적시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그에 대한 대응 또한 국제법의 경계 안에 있어야 한다. 피해의 기억은 정의의 근거가 될 수는 있어도, 무제한적 보복의 허가증이 될 수는 없다.
문제는 이스라엘의 최근 전쟁 수행이 오래전부터 그 경계를 심각하게 의심받아 왔다는 점이다. ICJ는 2024년 1월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제기한 사건에서, 가자지구 팔레스타인인들이 집단학살협약상 보호받는 집단임을 확인한 뒤 이스라엘에 대해 집단학살협약상 금지된 행위를 방지하고, 군이 그러한 행위를 하지 않도록 하며, 긴급히 필요한 기본 서비스와 인도적 지원이 제공되도록 즉각적이고 효과적인 조치를 취하라고 명령했다. 이 명령은 최종 판결이 아니라 잠정조치이지만, 국제사법기관이 그만큼 상황을 중대하게 보았다는 뜻이다. 홀로코스트의 교훈을 누구보다 무겁게 기억해야 할 국가가, 국제사법재판소로부터 이런 명령을 받는 현실 자체가 이미 깊은 도덕적 역설이다.
그 후 현실은 더 나아졌다고 말하기 어렵다.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은 2026년 4월 초에도 가자에서 계속된 공습과 민간인 사상, 민간 인프라 피해, 심각한 접근 제한과 보급 차질을 보고했다. UNRWA는 2026년 4월 1일 기준으로 가자에서 7만 2천 명이 넘는 팔레스타인인이 사망하고 17만 명 이상이 다쳤다고 전했는데, 이 수치는 가자 보건당국 자료를 OCHA가 보고한 것임을 함께 명시했다. 숫자의 출처와 검증 방식에 대해 논쟁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논쟁이, 민간인의 대규모 희생과 장기적 파괴가 엄연한 현실이라는 사실까지 지워주지는 못한다.
더 심각한 것은 전쟁의 방식이다. 국제형사재판소(ICC)는 2024년 11월 네타냐후 총리와 요아브 갈란트 전 국방장관에 대해 전쟁범죄 및 반인도범죄 혐의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ICC 공개 자료에 따르면, 여기에는 전쟁수단으로서의 기아 유발 혐의가 포함돼 있다. 체포영장이 곧 유죄 확정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세계 최고 수준의 국제형사사법기구가 현직 또는 직전 최고 지도자에게 이런 혐의를 적용했다는 사실은 결코 가볍지 않다. 네타냐후가 홀로코스트의 기억을 소환해 “우리는 세계를 지킨다”고 말할수록, 세계는 오히려 이렇게 되묻게 된다. 그렇다면 왜 국제형사재판소는 당신에게 기아를 전쟁수단으로 썼다는 혐의를 제기했는가.
인도주의 지원을 둘러싼 최근 조치도 같은 질문을 낳는다.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는 2026년 1월 이스라엘이 가자와 서안지구에서 37개 국제 NGO의 활동을 금지한 규제가 팔레스타인인들을 만성적 박탈 상태로 몰아넣고 생존 자체를 위협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OCHA 역시 가자에서 “주요 접근 및 보급 제약”이 계속되고 있다고 보고했다. 전쟁 중 적의 군사역량을 제한하려는 시도와, 민간인이 생존에 필요한 식량·의약품·구호망에서 집단적으로 차단되는 상황은 다른 문제다. 국제인도법이 금지하는 것은 바로 후자다. 민간인의 고통을 압박 수단으로 사용하는 순간, 안보 논리는 인권의 언어를 잃는다.
보건 체계의 붕괴 역시 “불가피한 부수 피해”라는 말로 넘기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다. 세계보건기구(WHO)는 가자 보건체계가 “한계점”에 놓여 있으며, 2023년 10월 이후 697건의 보건의료 공격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여러 주요 병원이 전투, 대피구역 설정, 공격으로 기능을 멈춘 사실도 WHO가 확인했다. 병원은 단지 건물이 아니라, 민간인의 생명선이다. 전쟁에서 병원이 무너질 때 함께 무너지는 것은 의료 시스템만이 아니다. 노인, 산모, 미숙아, 만성질환자 같은 가장 취약한 사람들의 생존 가능성 그 자체다. 홀로코스트의 기억이 정말로 인간 존엄의 최저선을 가르친다면, 오늘의 가자에서 병원과 환자의 파괴를 정상화하는 언어와는 양립할 수 없다.
네타냐후의 수사가 특히 위험한 이유는, 그것이 전쟁의 비례성과 책임을 묻는 모든 질문을 “문명을 지키려는 전쟁”이라는 도덕적 절대명제로 덮어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편적 인권은 어느 국가도 자신을 인류 전체의 도덕적 대리인으로 자처할 권리를 주지 않는다. 더구나 유엔 조사기구와 특별절차, 국제재판기관이 잇달아 경고와 조치를 내놓는 상황이라면, 이스라엘이 스스로를 “피해의 기억을 지닌 예외적 국가”로 상정하며 국제법의 일반 원칙 바깥에 서려는 태도야말로 가장 먼저 비판받아야 한다. 유엔 인권기구의 조사위원회는 2025년 9월 이스라엘이 가자에서 집단학살을 저질렀다고까지 결론 내렸다. 이 판단은 정치적으로도 법적으로도 매우 중대한 성격을 지니며 논쟁의 여지도 크다. 그러나 최소한 분명한 것은, 세계가 더 이상 이 전쟁을 단순한 자기방어의 범주 안에만 두고 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바로 그래서 홀로코스트의 기억은 더 엄격하게 다뤄져야 한다. 그 기억의 핵심은 “우리에게 가해졌던 일을 이제 우리가 타인에게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보편 윤리여야지, “우리가 겪은 고통 때문에 우리는 더 강한 권리를 가진다”는 예외주의가 되어서는 안 된다. 피해의 기억이 배타적 특권으로 바뀌는 순간, 역사는 교훈이 아니라 무기가 된다. 홀로코스트는 유대인만의 비극이 아니라 인류 전체가 인간 말살의 가능성을 기억하기 위해 붙드는 이름이다. 그렇다면 그 이름을 오늘의 전쟁 정당화에 끌어다 쓰는 행위는, 그 기억을 지키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훼손하는 일에 가깝다.
이스라엘의 안보 우려는 현실이다. 하마스의 인질 억류도 끝나지 않았고, 이란과 그 연계 세력의 위협 또한 실제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필요한 것은 법의 언어다. 민간인 보호, 비례성, 차별 원칙, 인도적 접근 보장, 포로와 인질의 보호, 고문 금지, 집단처벌 금지 같은 최소한의 기준이 무너지면, 남는 것은 힘의 경쟁뿐이다. 그리고 힘의 경쟁에서 언제나 가장 먼저 희생되는 것은 국가가 아니라 민간인이다. 전쟁은 대개 국경을 지키는 이름으로 시작되지만, 끝에 가서는 아이들의 밥과 약, 피난처와 미래를 빼앗는다. 지금 가자에서 벌어지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네타냐후의 발언을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결국 간단하다. 그는 홀로코스트의 교훈을 ‘다시는 누구에게도’가 아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식으로 뒤집고 있다. 그러나 보편적 인권의 관점에서 보면, 그 순간 그는 과거의 비극을 기억하는 지도자가 아니라 과거의 비극을 현재의 면죄부로 사용하는 정치인에 가까워진다. 홀로코스트의 기억을 진정으로 존중하는 길은 하나뿐이다. 유대인의 생명도, 팔레스타인인의 생명도, 예외 없이 똑같이 인간의 생명으로 대하는 것. 그 원칙을 버리는 순간, 아무리 숭고한 역사를 입에 올려도 그것은 더 이상 윤리가 아니라 권력의 수사일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