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혁명과 주류의 소모전…가족 서사로 풀어낸 정치적 충돌

폴 토머스 앤더슨(PTA) 감독의 신작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혁명 세력과 기득권 질서의 충돌을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이를 거대한 이념 대결보다 한 가족의 생존과 관계 문제로 풀어낸 작품으로 보인다. 급진 무장조직과 백인 주류 권력이 맞붙는 구조를 취하지만, 서사의 중심에는 한때 조직의 핵심 인물이었으나 지금은 몰락한 남성과 그의 딸이 놓여 있다.
영화 속에서 미국 사회를 뒤흔드는 것은 프렌치75라는 급진 무장조직이다. 이들은 이민자 추방, 인종차별, 낙태 금지 같은 사회적 억압에 맞서 폭력적 혁명을 주장한다. 이에 맞서는 쪽은 기존 질서를 수호하려는 백인 주류 권력이다. 작품은 이 대립 구도를 단순한 선악 대결로 그리기보다, 양측 모두 피로하고 낡은 얼굴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으로 읽힌다.
주인공 밥은 과거 프렌치75에서 폭탄 전문가로 활동했지만, 현재는 정부의 추적을 피해 딸 윌라를 지키며 살아가는 약물 의존 상태의 빈민으로 묘사된다. 혁명가의 이미지는 퇴색했고, 남은 것은 현실에 쫓기는 초라한 생존자에 가깝다. 작품은 이런 인물을 통해 과거의 급진성이 시간이 흐른 뒤 어떤 형태로 남는지를 보여주려는 듯하다.
이 영화가 비교적 넓은 공감대를 확보할 수 있는 이유는 정치적 갈등을 사랑, 우정, 가족애 같은 보편적 감정의 영역 안에 배치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밥이 딸을 찾아 나서는 과정은 이념 투쟁이라기보다 한 아버지의 절박한 추적에 가깝고,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혼란과 실수, 우스꽝스러운 순간들은 영화의 무게를 한층 덜어낸다. 혁명과 체제의 대결이라는 거창한 주제를 전면에 두면서도, 실제 감정선은 오히려 사적인 관계에 기대고 있는 셈이다.
반대편에 선 인물인 스티븐 록조 역시 단순한 권력의 얼굴로만 그려지지 않는다. 그는 외형적으로 강인함을 과시하지만, 동시에 허세와 취약성을 드러내는 인물로 설정돼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영화는 기득권 남성성의 허세를 풍자하고, 기존 질서의 권위 역시 절대적이거나 위엄 있는 것으로만 묘사하지 않는다. 숀 펜이 맡은 이 역할은 영화의 긴장감뿐 아니라 블랙코미디적 결을 강화하는 축으로 기능하는 듯하다.
흥미로운 지점은 이 작품이 다루는 주제뿐 아니라 그것을 만든 감독의 위치에도 있다. PTA는 대중적 흥행보다 작가주의적 성향으로 더 잘 알려진 감독이다. 그런 그가 대규모 제작비가 투입된 작품에서 혁명과 기득권의 대결, 그 안의 피로와 우스움, 몰락과 가족애를 함께 꺼내 들었다는 점은 이 영화의 성격을 더 분명하게 만든다. 블록버스터의 외형을 일부 빌리면서도, 내용적으로는 전형적인 흥행 공식과는 다소 거리를 두는 작품일 가능성이 크다.
다만 영화의 이런 시도가 모두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갈지는 별개의 문제다. 혁명 세력도 노쇠하고, 주류 질서도 찌질하게 묘사하는 방식은 양측 모두를 해체적으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흥미롭지만, 동시에 어느 쪽에도 충분히 깊게 몰입하지 못하게 만들 가능성도 있다. 정치적 메시지와 가족 서사, 풍자와 장중함이 얼마나 균형 있게 맞물리느냐가 작품 평가의 핵심이 될 것으로 보인다.
결국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끝없는 이념 대결을 다루면서도, 그 싸움의 실체가 얼마나 초라하고 개인적인 상처 위에 세워져 있는지를 보여주려는 영화로 읽힌다. 거대한 전쟁을 말하지만, 실은 그 안에서 늙고 흔들리고 무너지는 인간들을 응시하는 쪽에 더 가까운 작품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