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3억 소송 또 막혔다…담배 책임 인정 못 한 법원, ‘건보 재정’ 논쟁 남겼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담배회사를 상대로 제기한 533억 원 규모 손해배상 소송이 2심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흡연과 질병 사이의 인과관계를 법적으로 입증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유지되면서 10년 넘게 이어진 소송이 다시 제동이 걸렸다. 패소를 넘어 공공의료 재정과 기업 책임 범위를 둘러싼 논쟁이 이어질 전망이다.
서울고법 민사6-1부는 15일 건보공단이 KT&G, 한국필립모리스, BAT코리아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1심과 같은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담배에 설계상 결함이나 표시상 문제가 있다고 보기 어렵고, 담배회사가 유해성과 중독성을 의도적으로 숨겼다고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핵심 쟁점은 인과관계였다. 건보공단은 장기간 흡연 후 폐암과 후두암을 진단받은 환자 3465명에게 지급한 진료비 533억 원을 근거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그러나 법원은 보험급여 지급이 담배회사 불법행위에 따른 손해가 아니라 보험계약에 따른 의무 이행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흡연과 질병 사이의 직접적 인과관계 역시 개별 사건에서 입증하기 어렵다고 봤다.
이번 판단은 기존 대법원 판례와 같은 흐름이다. 2014년 대법원은 흡연 사실과 폐암 발생 사실만으로 둘 사이의 인과관계를 곧바로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한 바 있다. 2심 재판부 역시 역학적 연구는 집단 단위의 통계일 뿐 개인의 질병 원인을 특정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밝혔다.
문제는 판결 이후다. 흡연으로 인한 의료비 부담은 여전히 공공재정이 떠안는 구조다. 건강보험은 흡연 관련 질환 치료비를 지속적으로 지출하고 있지만, 그 비용을 기업에 전가할 법적 근거는 확보되지 못한 상태다. 결과적으로 비용은 가입자 전체가 분담하는 방식으로 남는다.
해외에서는 다른 접근이 이어져 왔다. 미국은 1998년 담배회사들과의 ‘마스터 합의’를 통해 수십조 원 규모의 배상금을 받아냈다. 각 주 정부가 의료비 부담을 근거로 소송을 제기했고 기업은 광고 제한과 경고 문구 강화 등을 수용하는 대신 재정 부담을 분담했다. 법적 책임 인정 여부와 별도로 사회적 비용을 조정하는 방식이었다.
국내에서는 같은 방식이 작동하지 않았다. 법원이 개별 환자 단위의 인과관계를 요구하면서 집단적 피해에 대한 책임을 기업에 묻는 구조가 성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 2심 판결 역시 그 한계를 다시 확인한 결과로 해석된다.
흡연에 대한 사회 인식은 이미 달라졌다. 경고 그림과 광고 제한, 실내 금연 정책이 확대되면서 유해성 자체는 공론화된 상태다. 그럼에도 법원 판단은 과거 흡연 환경과 현재 인식을 구분해 접근했다. 재판부는 사건 대상자들이 흡연하던 시기의 상황을 기준으로 판단이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건보공단은 반발하고 있다. 정기석 이사장은 “담배 유해성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향후 상고 여부와 추가 대응이 검토될 가능성이 있다.
이번 판결은 흡연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을 누가 부담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다시 노출시켰다. 개인 책임과 기업 책임, 그리고 공공 재정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에 대한 논쟁은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다.
결국 남은 질문은 명확하다. 흡연의 위험은 사회적으로 공유되고 있지만, 그 비용은 여전히 분산돼 있다. 법원이 인과관계의 벽을 유지하는 한 이 구조는 쉽게 바뀌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