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서울 밖에서 예술은 가능한가, 중심이 아니라 기준이 되버린 수도권 고착

한국 문화예술계의 불균형은 흔히 “서울 집중”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틀린 진단은 아니다. 중요한 공연과 전시, 출판과 비평, 기획과 유통, 인맥과 기회가 수도권에 몰려 있다는 사실은 이제 새삼스러운 이야기도 아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단순히 집중의 문제로만 말하면 정작 더 깊은 층위는 놓치게 된다. 중심은 어느 사회에나 생긴다. 문제는 서울이 중심을 넘어 기준이 되어 버렸다는 데 있다. 어떤 작업이 지금 동시대적인지, 어떤 예술가가 성장하고 있는지, 무엇이 더 세련되고 본격적인지 판단하는 말들의 배경에는 대개 서울의 질서가 깔려 있다. 서울의 예술은 그냥 예술이지만, 서울 밖의 예술은 자주 ‘지역’이라는 수식어를 먼저 달고 등장한다. 이 차이는 행정상의 분류가 아니다. 무엇을 보편으로 보고 무엇을 예외로 취급해 왔는지 드러내는 문화적 고백에 가깝다.
그래서 지역 예술을 말할 때 가장 먼저 버려야 할 것은 동정의 시선이다. 지역에도 예술이 필요하다는 말은 얼핏 온당해 보이지만, 그 문장에는 이미 미묘한 위계가 숨어 있다. 마치 본래의 중심은 다른 곳에 있고, 지역은 그 혜택을 나누어 받아야 하는 자리인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술은 배급되는 복지품이 아니다. 어떤 장소에서든 삶이 있다면, 그 삶을 해석하고 형상화하려는 시도 역시 그곳에서 발생한다. 문제는 지역에 예술이 없어서가 아니다. 지역에서 이미 만들어지고 있는 작업들이 동등한 현재로 읽히지 못하는 데 있다. 존재의 부족이 아니라 인정의 부족, 생산의 빈곤이 아니라 승인 구조의 편향이 핵심이다.
한국 문화예술계는 오랫동안 지역을 창작의 현장이라기보다 지원의 대상으로 다루는 데 익숙했다. 정책 문서에는 언제나 균형, 활성화, 거점, 향유 같은 말이 등장한다. 물론 그런 언어가 전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말들이 반복될수록 지역은 살아 있는 예술의 현장이라기보다 외부의 동력을 공급받아야 굴러가는 사업 단위처럼 보인다. 활성화라는 말에는 이미 충분히 활발하지 않다는 전제가 있고, 향유라는 말에는 시민을 생산자가 아닌 소비자로만 보는 시선이 들어 있다. 지역 예술을 논하면서 정작 지역에서 어떤 미감이 형성되고 어떤 언어가 자라고 있으며 어떤 갈등이 작품으로 번역되고 있는지는 잘 묻지 않는다. 그 대신 몇 개의 축제와 몇 건의 공모, 몇 곳의 거점 공간이 성과처럼 제시된다. 이렇게 되면 지역은 예술이 발생하는 장소가 아니라 문화 행정이 관리하는 항목으로 축소된다.
하지만 예술은 항목으로 살아남지 않는다. 예술은 결국 누가 누구를 발견하는지, 어디에서 어떤 대화가 가능한지, 작업이 어떤 언어로 해석되고 축적되는지에 의해 자란다. 이 점에서 서울은 단순히 규모가 큰 도시가 아니다. 창작과 해석, 유통과 비평이 서로를 증폭시키는 장소다. 전시를 열면 볼 사람이 있고, 공연을 올리면 연결될 기획자가 있으며, 책을 내면 반응을 돌려줄 편집자와 평론가가 있다. 반면 지역의 예술가는 작업만으로 평가받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왜 서울이 아닌 곳에 있는지, 그 장소에서 어떤 지속 가능성이 있는지, 지역성이라는 이름 아래 무엇을 설명할 수 있는지까지 덧붙여야 한다. 서울의 예술가는 작품으로 먼저 읽히지만, 지역의 예술가는 종종 위치부터 해명해야 한다. 이 차이는 작지 않다. 한쪽은 창작으로 심사받고, 다른 한쪽은 존재 조건까지 입증해야 한다면, 그것은 경쟁의 차이가 아니라 승인 절차의 차이다.
흔히 실력이 있으면 결국 알려진다고 말한다. 이 말은 절반만 맞다. 실력은 중요하다. 하지만 실력이 스스로를 증명하는 방식은 결코 추상적이지 않다. 누가 먼저 보고, 누가 언급하고, 누가 다음 기회를 연결하느냐에 따라 실력은 드러나기도 하고 묻히기도 한다. 예술은 시험 점수처럼 측정되지 않는다. 결국 누적된 시선과 관계망 속에서 평가가 형성된다. 서울은 바로 그 누적이 가장 빠르게 일어나는 장소다. 반대로 지역은 재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발견의 속도와 증폭의 밀도에서 밀린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구조적 차이를 개인의 부족처럼 말해 왔다. 지역에서 활동하는 예술가에게 더 자주 요구되는 것은 더 높은 완성도만이 아니다. 그곳에 남아 있는 이유를 설득력 있게 설명하는 태도까지 요구된다. 예술적 성취에 더해 삶의 선택까지 방어해야 하는 현실은, 지역이 아직 동등한 기반으로 승인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 결과 많은 예술가에게 서울행은 선택이 아니라 경로가 된다. 더 많은 기회를 찾기 위한 이동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다. 문제는 그 이동이 지나치게 자연스러운 상식이 되어 버렸다는 데 있다. 한 사회의 문화예술 생태계가 건강하다면 중심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층위로 존재해야 한다. 각 지역 안에서도 작업이 생산되고, 해석되고, 유통되고, 다시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순환이 가능해야 한다. 그래야 장소가 단지 배경이 아니라 창작의 조건이 된다. 그러나 지금의 구조는 지역에 남는 일을 개인의 사명감처럼 만든다. 서울로 가면 경력 관리가 되고, 남으면 헌신이 된다. 제도가 감당해야 할 문제를 개인의 애정과 인내로 버티게 하는 구조는 오래 갈 수 없다. 그런 구조에서 살아남은 예술가는 칭찬받을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생태계는 건강하다고 말할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문화예술계가 지역을 다룰 때 자주 두 가지 오류를 반복한다는 점이다. 하나는 낭만화이고, 다른 하나는 시혜다. 낭만화는 지역을 느리고 따뜻한 공동체의 공간으로 이상화한다. 시혜는 지역을 늘 부족한 상태로 상정하고 무언가 채워 넣어야 할 대상으로 본다. 그러나 실제의 지역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그곳에도 폐쇄적인 관계망이 있고, 보수적인 시선이 있으며, 동시에 서울보다 더 날카로운 현실 감각과 더 과감한 실험이 가능한 조건도 있다. 중요한 것은 지역을 아름답게 포장하는 일이 아니라, 지역을 하나의 현실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서울의 삶만 보편이고 다른 장소의 삶은 특수하다는 암묵적 전제가 계속되는 한, 지역 예술은 늘 해설이 필요한 존재로 남을 수밖에 없다.
예술은 장소를 초월하는 순수한 정신의 산물처럼 이야기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언제나 구체적인 장소의 조건 속에서 태어난다. 임대료, 이동 시간, 관객의 밀도, 지역사회와의 거리, 협업 가능한 동료의 존재, 행정의 언어와 제도의 태도가 모두 창작의 형식에 스며든다. 그렇다면 서울 밖의 예술은 서울 예술의 축소판이 아니라, 다른 조건에서 형성된 동시대성으로 읽혀야 한다. 지역 예술을 제대로 다룬다는 것은 서울의 인프라를 축소 복제하는 일이 아니다. 서로 다른 장소에서 나온 감각과 문제의식이 동등한 무게로 만나게 하는 일이다. 필요한 것은 지방에도 기회를 조금 더 나눠 주는 배려가 아니라, 지금의 문화예술이 무엇을 중심으로 삼아 왔는지 근본부터 다시 묻는 일이다.
서울 밖에서 예술은 가능한가. 사실 이 질문 자체가 이미 편향돼 있다. 가능하지 않았다면 지금껏 지역에서 작업해 온 수많은 예술가의 시간은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가능은 오래전부터 이미 이루어지고 있었다. 다만 그 가능이 공정한 가시성과 지속 가능한 구조를 얻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제 필요한 것은 지역을 더 사랑하자는 구호가 아니다. 더 정확한 인정이다. 서울 바깥의 예술을 예외가 아니라 동등한 현재로 인정하는 일, 지역을 지원 대상이 아니라 사유와 창작의 생산지로 대하는 일, 그리고 문화예술계가 오랫동안 숨겨 온 수도권 중심주의를 더 이상 상식으로 두지 않는 일이다. 지역 예술이 중심에 편입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중심이 스스로의 기준을 의심해야 한다. 서울은 여전히 중심일 수 있다. 그러나 더 이상 유일한 기준이어서는 안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