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전시

필리프 조르당, 서울시향과 첫 호흡…브루크너 9번으로 ‘상실’ 응축

[29일 서울 송파구 롯데콘서트홀에서 서울시향의 2026년 시즌 첫 정기공연 ‘필리프 조르당의 브루크너 교향곡 9번’이 열렸다. 제공:서울시립교향악단 제공]

세계적 지휘자 필리프 조르당이 서울시립교향악단과 첫 무대에서 브루크너 교향곡 9번을 통해 ‘상실’의 정서를 밀도 있게 끌어냈다. 프로그램 전체를 관통하는 정서를 일관된 흐름으로 정리한 연주였다.

서울시향은 1월 29일 서울 송파구 롯데콘서트홀에서 2026년 시즌 첫 정기공연을 열고 조르당을 지휘자로 초청했다. 조르당이 해외 오케스트라와 함께 한국 무대에 선 적은 있지만, 국내 악단을 직접 지휘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조르당은 빈 슈타츠오퍼 음악감독을 지낸 인물로, 베를린 필하모닉,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등 주요 무대에서 활동해왔다. 오페라와 교향곡을 넘나드는 레퍼토리를 바탕으로 유럽 전통 지휘 계보를 잇는 중견 지휘자로 평가된다. 특히 리하르트 바그너 작품 해석에서 쌓은 경험을 토대로 긴 호흡의 구조를 안정적으로 이끌고, 음향을 층위별로 쌓아 올리는 지휘가 특징이다. 과도한 감정 표현보다 악보에 기반한 균형과 밀도를 중시하며, 각 파트의 음색을 정리해 전체 사운드를 조직하는 방식으로 독일 후기 낭만 레퍼토리에서 안정된 해석을 보여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번 공연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메타모르포젠’과 안톤 브루크너 교향곡 9번으로 구성됐다. 두 작품은 전쟁과 죽음, 종말의 인식을 배경으로 ‘상실’이라는 정서를 공유한다.

‘메타모르포젠’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독일 도시와 문화유산의 파괴를 목격한 슈트라우스가 남긴 후기 작품이다. 23명의 현악기로만 연주되며, 각 악기가 다른 선율을 이어가면서 하나의 긴 흐름을 만든다. 뚜렷한 주제보다는 변형되는 선율이 이어지며, 무너진 시대에 대한 애도와 허무가 음악 전반에 깔린다.

브루크너 교향곡 9번은 작곡가가 생의 마지막에 남긴 미완의 교향곡이다. 세 악장만 완성된 채 남았으며, 신에 대한 헌정으로 알려진 작품이다. 장대한 화성과 느린 전개, 반복되는 동기가 특징으로, 음악은 고조와 침잠을 반복하며 긴 호흡으로 전개된다. 마지막 악장 아다지오는 삶의 끝을 마주한 듯한 정서와 미완의 여운을 남긴다.

두 작품은 형식과 시대는 다르지만, 개인의 죽음과 역사적 파괴를 함께 마주한 음악이라는 점에서 공통된 정서를 형성한다.

공연에서 조르당은 감정을 과장하기보다 선율을 눌러 쌓는 방식으로 긴장을 유지했다. 개별 악기의 선을 드러내기보다 전체 음향을 하나의 덩어리로 묶는 접근이었다.

연주가 끝난 뒤 이어진 약 15초의 정적은 이 곡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냈다. 음악이 멈춘 뒤에도 감정의 흐름을 끊지 않는 방식이었다.

이어진 브루크너 교향곡 9번은 공연의 중심이었다.

1악장에서 조르당은 음향을 서두르지 않고 화음을 층층이 쌓으며 구조를 먼저 세웠다. 금관의 울림은 공간을 넓히며 전체 음향을 확장했다. 서울시향은 과장된 볼륨을 피하면서도 밀도 있는 균형을 유지했다.

2악장 스케르초에서는 리듬 처리의 정교함이 드러났다. 현악의 반복적인 움직임을 세밀하게 통제하며 속도와 밀도를 동시에 조율했다. 추진력을 과시하기보다 긴장을 유지하는 데 집중한 해석이었다.

3악장 아다지오는 공연의 정점이었다. 초반의 침잠과 후반의 확장이 대비되며, 미완의 교향곡이 지닌 공허와 여운이 길게 남았다. 조르당은 최소한의 동작으로 흐름을 정리하다가, 음향이 밀려오는 순간 응축된 제스처로 악단을 한 방향으로 모았다.

이번 공연은 첫 협업이라는 점에서도 의미를 남겼다. 조르당은 오케스트라를 밀어붙이기보다 음향을 정리하고 균형을 맞추는 방식으로 접근했고, 서울시향 역시 지휘자의 해석에 맞춰 응집된 소리를 유지했다.

프로그램 전체를 관통한 것은 ‘상실’의 정서였다. 슈트라우스에서 시작된 침잠은 브루크너에서 확장됐고, 마지막 악장에서 미완의 형태로 남았다. 조르당은 이를 감정이 아니라 구조와 음향으로 드러냈다.

서울시향과 조르당은 30일 예술의전당에서 같은 프로그램을 이어간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