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극장]전함 포템킨,혁명은 어떻게 이미지가 되는가… 몽타주의 정치학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전함 포템킨은 영화사에서 가장 자주 호출되는 고전 가운데 하나다. 이 작품이 여전히 강력한 이유는 혁명을 소재로 삼았기 때문이 아니라, 혁명이라는 집단적 에너지를 영화라는 매체의 형식 안에 새겨 넣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전함 포템킨은 어떤 정치적 사건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사건을 지각하고 অনুভ끼게 만드는 영화적 감각 자체를 발명한 작품이다. 이 영화를 볼 때 관객이 마주하는 것은 운동, 충돌, 리듬, 긴장, 그리고 집단적 정동의 조직이다. 그렇기에 전함 포템킨은 혁명에 관한 영화인 동시에 영화 형식의 혁명에 관한 작품이다.
이 영화가 만들어진 1925년이라는 시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러시아 혁명 이후 소비에트 국가는 영화가 대중을 교육하고 조직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예술 매체라고 판단했고, 에이젠슈타인은 그 가능성을 가장 급진적으로 밀어붙인 감독이었다. 그러나 전함 포템킨을 단순히 소비에트 선전영화라고만 규정하는 순간, 이 작품의 영화사적 급진성은 오히려 축소된다. 이 영화는 분명 이념적 목적을 가진 국가적 프로젝트의 산물이지만, 그 목적을 수행하는 방식이 너무나도 정교하고 창조적이어서 결과적으로 정치적 메시지를 넘어 영화 언어 자체를 재구성하는 단계에까지 나아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말하느냐보다 어떻게 말하느냐다. 전함 포템킨은 메시지를 외치는 영화가 아니라, 형식을 통해 메시지가 발생하도록 만드는 영화다.
에이젠슈타인의 영화 이론에서 핵심은 몽타주다. 그것은 쇼트와 쇼트가 충돌할 때 새로운 의미가 발생한다는 사유의 방식이며, 관객의 감정과 인식을 능동적으로 조직하는 기계다. 전함 포템킨에서 개별 쇼트는 혼자서는 완결된 의미를 갖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서로 맞부딪힐 때 생기는 전기적 긴장이다. 에이젠슈타인은 영화를 연속적인 기록이 아니라 충돌의 예술로 본다. 그래서 이 영화의 편집은 매끄럽고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대신, 끊기고, 밀치고, 압축하고, 고조시키며 관객의 신경을 자극한다. 영화는 이야기를 따라가게 하기보다, 감각을 각성시키고 정서적 방향을 강제한다. 바로 이 점에서 전함 포템킨은 서사의 예술이기 이전에 리듬의 예술이다.
이 영화를 대표하는 오데사 계단 시퀀스는 그러한 에이젠슈타인의 미학이 가장 완전한 형태로 구현된 장면이다. 오늘날 이 장면은 너무도 자주 인용되어 하나의 영화사적 상징처럼 소비되지만, 원전을 다시 볼 때 비로소 그 시퀀스의 진정한 힘이 드러난다. 군인들의 일사불란한 하강, 공포에 휩싸여 흩어지는 군중, 피격당한 시민들의 얼굴, 계단 아래로 끝없이 굴러가는 유모차는 각각 하나의 사건이라기보다 집단적 공포가 분절되고 증폭되는 감각의 단위들이다. 여기서 폭력은 단순히 화면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아니라, 편집의 리듬을 통해 관객의 신체 안으로 침투한다. 관객은 그 장면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육체적으로 겪는다. 이처럼 전함 포템킨은 감정을 묘사하지 않고 감정을 생산한다. 몽타주는 바로 그 생산의 기술이다.
특히 오데사 계단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사실적 정확성이 아니다. 실제 역사와 다르다는 지적은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다. 그러나 에이젠슈타인에게 역사적 사실은 영화적 진실보다 우선하지 않는다. 그는 현실을 복제하려 하지 않고, 현실의 본질적 폭력과 집단적 각성을 가장 응축된 형태로 재구성한다. 그런 의미에서 전함 포템킨의 역사성은 기록영화의 역사성이 아니라, 정동의 역사성에 가깝다. 영화는 1905년의 반란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억압과 저항이 어떤 감각으로 체험되는가를 창조한다. 여기서 영화는 역사를 반영하는 거울이 아니라, 역사를 감각적으로 재구성하는 기계가 된다.
전함 포템킨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 중 하나는 이 영화에 전통적인 의미의 주인공이 부재한다는 사실이다. 할리우드 고전영화가 강한 개성과 목표를 지닌 개인을 중심으로 서사를 조직한다면, 에이젠슈타인의 영화는 개인을 집단 속으로 녹여낸다.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특정 인물의 심리나 성장 과정이 아니라, 얼굴들이 모여 이루는 군중의 표정이다. 수병들, 시민들, 군인들, 애도하는 사람들, 분노하는 사람들, 달아나는 사람들. 각각의 얼굴은 하나의 캐릭터로서보다 집단적 감정의 파편으로 기능한다. 전함 포템킨은 개인을 영웅화하는 대신, 군중을 주체화한다. 이는 곧 혁명의 형상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에 대한 영화적 대답이기도 하다. 혁명은 위대한 한 사람의 의지가 아니라 이름 없는 다수의 감정이 집결되는 순간에 발생한다는 믿음이 이 영화 전체를 지탱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의 집단성이 무조건적인 낭만화로만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군중은 영웅적인 동시에 취약하다. 그것은 쉽게 학살당하고 공포에 휩쓸리지만, 동시에 새로운 연대와 각성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에이젠슈타인은 군중을 미화하기보다는, 군중이 역사적 힘이 되어가는 과정을 리듬과 시선의 조직 속에서 구축한다.
물론 오늘의 시선으로 보면 전함 포템킨은 분명 직접적이고 선동적이다. 선악의 대립은 비교적 명료하고, 감정 유도 역시 숨기지 않는다. 이 영화의 이념적 목적은 너무도 노골적이어서 어떤 관객에게는 도식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그 노골성 안에야말로 이 영화가 속한 시대의 진실이 있다. 전함 포템킨은 예술의 자율성을 주장하는 영화가 아니라, 예술이 세계를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영화다. 그것은 관객을 관조의 위치에 두지 않고,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할 대상으로 상정한다. 따라서 이 작품을 두고 “너무 선전적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맞는 진단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영화가 선전조차 형식적 발명을 통해 얼마나 높은 차원의 예술로 끌어올릴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전함 포템킨은 이후 영화사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다. 브라이언 드 팔마의 언터처블부터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테리 길리엄, 우디 앨런, 그리고 수많은 광고와 뮤직비디오에 이르기까지 오데사 계단의 이미지는 끊임없이 복제되고 변주됐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용은 원전의 정치적 급진성보다 형식적 스펙터클만 차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 점은 역설적이다. 가장 정치적인 영화 중 하나가 영화사 안에서는 형식의 교본으로 더 널리 소비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역설은 오히려 전함 포템킨의 위대함을 증명한다. 이 작품은 특정 이데올로기의 산물인 동시에, 그 이데올로기적 국면을 넘어설 만큼 강력한 영화 언어를 발명했다. 즉 전함 포템킨은 시대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시대를 초과하는 형식의 사건이다.
지금 전함 포템킨을 다시 본다는 것은 단지 영화사의 교과서를 복습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영화가 한때 얼마나 강한 사회적 에너지와 결합할 수 있다고 믿어졌는지, 이미지가 인간의 감각과 정치적 의식을 어떻게 조직할 수 있는지 다시 묻는 일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미지의 홍수 속에 살고 있지만, 그 많은 이미지가 반드시 사유와 감정을 깊게 흔드는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전함 포템킨은 여전히 급진적이다.
결국 전함 포템킨은 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다룬 영화라기보다, 영화가 어떻게 혁명적 형식이 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것은 개인보다 집단을, 재현보다 구성를, 설명보다 충돌을 택한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이 작품이 여전히 현재형으로 읽히는 까닭은, 그것이 과거의 혁명을 박제한 고전이 아니라 영화가 할 수 있는 가장 급진적인 가능성을 끝까지 밀어붙인 사례이기 때문이다. 전함 포템킨은 혁명을 보여준 영화가 아니다. 영화 자체를 혁명의 형식으로 바꿔놓은 영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