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춤이라는 전제 흔들었다”…서울시무용단 ‘스피드’, 한국무용 감각 재구성

서울시무용단 신작 ‘스피드(speed)’가 4월 24일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개막하며, 한국무용을 둘러싼 고정된 인식이 실제 무대에서 재해석되는 장면이 펼쳐졌다.
이번 공연은 지난해 부임한 윤혜정 서울시무용단장이 처음 선보이는 창작 작품이다. 그는 프레스콜에서 “한국무용의 속도는 외형적 기술이 아니라 몸 안에 체화된 움직임에서 나온다”고 설명하며, 발레나 현대무용의 기교 중심 속도와는 다른 개념임을 강조했다. 속도를 전면에 내세운 기획은 형식 실험이라기보다 한국무용의 감각 체계를 다시 정의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무대는 장단의 구조를 해체하고 재조합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장구와 타악, 전자음악이 결합된 리듬 위에서 무용수들은 느림에서 출발해 급격한 가속으로 치닫고, 다시 정지에 가까운 상태로 회귀한다. 특히 붉은 LED 조명이 무대를 채우는 장면에서 8명의 무용수가 각기 다른 동작으로 빠르게 질주하는 대목은 인상적으로 남는다. 규칙적인 장단이 깨지며 엇박이 발생하는 순간, 무용수의 움직임은 외부 리듬을 따르기보다 스스로 속도를 생성하는 방향으로 전환된다.
작품의 중심에는 ‘속도는 어디에서 발생하는가’라는 질문이 놓인다. 군무가 사라진 뒤 한 명의 무용수가 장구 장단에 맞춰 즉흥적으로 춤을 이어가는 장면은 이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느림과 빠름이 반복되는 흐름 속에서 속도는 외부 자극이 아니라 신체 내부에서 조직되는 감각으로 제시된다. 이는 한국무용의 속도를 ‘완만한 흐름’으로 단순화해 온 기존 인식을 구조적으로 흔드는 장치다.
음악 구성 역시 이러한 감각을 확장한다. 국악 기반 타악 연주자 황민왕과 프랑스 출신 전자음악가 해미 클레멘세비츠가 무대에서 즉흥적으로 협주하며, 춤과 음악이 고정된 구조가 아닌 상호 반응 속에서 전개된다. 클레멘세비츠는 공연 참여 과정에서 “한국무용은 속도가 빨라져도 움직임의 유연성과 섬세함이 유지된다”고 말했다. 속도와 부드러움이 동시에 작동하는 특성이 외부 창작자의 시선에서도 확인된 셈이다.

관객 반응도 주목된다. ‘스피드’는 공연 개막 전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 전통무용 기반 공연에서 이 같은 속도는 흔치 않은 흐름이다. 공연예술통합전산망(KOPIS)에 따르면 2023년 기준 무용 장르 공연 관객 수는 전체 공연 시장에서 약 4~5% 수준에 머물러 있으며, 특히 전통무용 계열은 관객 고령화와 수요 정체가 지속적으로 지적돼 왔다. 이런 상황에서 매진 사례는 장르 외부 관객의 유입 가능성을 보여주는 지표로 해석된다.
이 같은 변화는 국공립 예술단체의 전략 변화와도 연결된다. 최근 서울시무용단, 국립무용단 등 주요 단체들은 전통 형식을 유지하면서도 동시대적 감각을 결합하려는 시도를 확대하고 있다. 한국무용이 박제된 전통이 아니라 현재형 장르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감각과 관객층을 확보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배경에 깔려 있다.
무용평론가 장광열은 2024년 한 세미나에서 “한국무용의 가장 큰 과제는 형식 보존이 아니라 감각의 현재화”라며 “동시대 관객이 체감할 수 있는 리듬과 신체 언어를 어떻게 재구성하느냐가 관건”이라고 지적했다. 이번 ‘스피드’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속도’라는 물리적 감각으로 구체화한 것으로 볼 수있다.
해외에서도 전통 춤의 동시대화는 주요 흐름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일본 부토는 1960년대 전통 신체 개념을 해체하는 방식으로 출발해 현재는 유럽 공연예술 시장에서 하나의 독립 장르로 자리 잡았고, 인도 전통무용 역시 현대무용과의 결합을 통해 국제 페스티벌 진출을 확대해 왔다. 전통을 유지하는 방식이 아니라 재구성하는 방식이 국제 무대에서 경쟁력을 확보하는 경로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에서, ‘스피드’의 시도 역시 이 흐름과 맞닿아 있다.
다만 이번 실험이 장기적인 레퍼토리 전략으로 이어질지는 지켜볼 필요가 있다. 속도라는 감각적 장치를 통해 한국무용의 외연을 확장하는 데 성공하더라도, 그것이 반복 가능한 형식으로 정착할 수 있을지는 별도의 문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