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프란치스코 교황 선종…가난한 이들과 함께한 12년, 세계가 애도했다

[출처:바티칸뉴스]

프란치스코 교황이 21일 오전 7시35분 로마 현지시간 바티칸 내 거처인 카사 산타 마르타에서 선종했다. 교황청은 같은 날 오전 9시47분 교황청 궁무처장 케빈 패럴 추기경의 영상 발표를 통해 이를 공식 확인했다. 이후 교황청 보건위생국은 교황의 직접 사인을 뇌졸중에 이은 혼수, 그리고 비가역적 순환기 기능 정지로 발표했다. 향년 88세. 2013년 3월 13일 콘클라베에서 선출돼 제266대 교황으로 즉위한 지 12년 만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출신의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였다. 가톨릭 역사상 첫 라틴아메리카 출신 교황이었고, 예수회 출신으로는 처음 성베드로좌에 오른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교황명으로 ‘프란치스코’를 택했다. 가난과 청빈, 평화를 상징하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떠올리게 하는 이 이름은 이후 12년 재위의 방향을 압축적으로 보여줬다. 교황청 전통의 상징이던 사도궁 대신 산타 마르타의 소박한 숙소를 택하고, 의전과 장식을 줄이며, 권위보다 현장을 앞세운 행보는 재임 초부터 그의 상징이 됐다.

그의 재위는 한마디로 ‘가난한 이들과 주변부를 향한 교황직’으로 요약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난민과 이주민, 전쟁 피해자, 빈곤층을 반복해 언급했고, 교회가 제도와 권위에 머물지 말고 상처 입은 세상 한가운데로 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일관되게 냈다. 유엔의 안토니우 구테흐스 사무총장은 선종 당일 성명에서 그를 “희망과 겸손, 인간성의 사자”로 부르며, 평화와 인간 존엄, 사회 정의를 위한 목소리였다고 평가했다. 세계 각국 정상들도 그를 가난한 이들의 편에 섰던 지도자, 평화의 중재자, 기후 위기와 불평등 문제를 외면하지 않았던 종교 지도자로 기억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대표적 유산으로는 2015년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를 빼놓기 어렵다. 그는 이 문서에서 환경 파괴와 기후 위기를 단순한 과학·정책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삶과 가난, 경제 구조, 세대 간 정의가 얽힌 문제로 다뤘다. 특히 이 회칙은 “우리 공동의 집”이라는 표현으로 널리 알려지며 가톨릭 신자만이 아니라 비신자와 국제사회 전체를 향한 호소문으로 읽혔다. 실제로 교황청은 이 문서를 지구상 모든 사람과의 대화 시도로 제시했고, 이후 프란치스코 교황은 기후 위기를 현대 문명의 도덕적 과제로 꾸준히 강조했다.

종교 간 대화 역시 그의 중요한 업적이었다. 2019년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에서 알아즈하르의 아흐마드 알타이이브 대이맘과 함께 ‘세계 평화와 공존을 위한 인간 형제애 문서’에 서명한 일은 그 정점 가운데 하나였다. 이 문서는 종교와 문화의 차이를 넘어 상호 존중과 협력을 통해 평화를 추구하자는 내용으로, 훗날 유엔이 2월 4일을 ‘국제 인간 형제애의 날’로 기념하는 배경에도 영향을 미쳤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교회 울타리 안에 머무르지 않고 현대 세계의 갈등을 줄이기 위한 종교 간 접촉에 적극 나섰다는 점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한국과의 인연도 깊다. 그는 2014년 8월 13일부터 18일까지 한국을 방문해 아시아청년대회에 참석했고, 서울 명동성당에서 한반도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를 집전했다. 당시 강론에서 그는 한국이 겪어온 분열의 상처를 언급하며, 용서와 화해, 대화의 길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호소했다. 방한 기간 세월호 참사 유가족을 위로한 장면은 종교를 넘어 한국 사회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번 선종 뒤 국내 가톨릭계는 물론 불교, 개신교, 원불교 등에서도 애도 메시지가 이어진 배경에는 바로 그 기억이 자리하고 있다.

말년의 건강은 좋지 않았다. 그는 2025년 2월 로마 제멜리 병원에 입원해 양측성 폐렴 치료를 받았고, 38일간 입원 끝에 3월 23일 바티칸으로 돌아왔다. 의료진은 당시 최소 두 달간의 안정과 회복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그는 부활절 전후 공개 일정을 완전히 멈추지 않았다. 선종 하루 전인 4월 20일 부활절 미사 직후 성베드로광장에 모습을 드러내 군중을 맞았고, 차량을 타고 광장을 돌며 신자들에게 인사했다. 그것이 사실상 마지막 대중 앞 모습이 됐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12년은 늘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는 교회의 포용성과 개혁을 강조했지만, 성직자 성학대 대응의 한계와 전통주의 진영과의 갈등 속에서 비판도 받았다. 그럼에도 그의 시대를 특징짓는 장면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많은 이들은 여전히 화려한 의전보다 소박한 차림으로 사람들 곁에 서 있던 모습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로마에서 시작된 애도는 곧 전 세계로 번졌고, 유엔과 각국 정부, 종교 지도자들은 그를 한 종교의 수장을 넘어 평화와 자비, 인간 존엄을 말해 온 공적 인물로 기억했다.

교황의 죽음은 곧 새 교황 선출 절차를 뜻하지만,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이 남긴 질문은 그보다 오래갈 가능성이 크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의 목소리를 계속 품을 것인가. 종교는 기후 위기와 전쟁, 난민과 불평등의 시대에 어떤 언어로 세상과 만날 것인가.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 질문을 남기고 떠났다. 그리고 세계는 지금, 한 시대를 통과한 교황의 마지막을 담담히 애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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