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프리마 파시’, 김신록 “성폭력 피해 연기, 진정성 고민”…무대 위 재현

성폭력 피해를 다룬 연극이 무대에 오르면서 배우의 재현 방식과 책임에 대한 고민이 함께 제기되고 있다. 피해 경험을 연기하는 과정에서 표현의 진정성과 윤리적 기준이 중요해졌다는 지적이다.
배우 김신록은 1인극 ‘프리마 파시(Prima Facie)’에서 성폭력 피해를 입은 변호사 ‘테사’ 역을 맡아 무대에 올랐다. 지난해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이후 1년 만의 연극 복귀다.
김신록은 23일 기자들과 만나 “성폭력 피해자가 실제 존재하는 세계에서 ‘내가 그 당사자’라고 말하는 데는 책임감과 진정성이 필요하다”며 “그 지점을 설득력 있게 표현하기 위해 많은 고민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극 후반부 핵심 대사에 대해 “마지막 순간에야 ‘피해자이자 생존자로서 말한다’는 발화를 선택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연기의 완성보다 표현의 정당성을 먼저 고민했다는 의미다.
‘프리마 파시’는 성폭력 사건을 다뤄온 변호사가 스스로 피해자가 되면서 사법 시스템을 다시 바라보게 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피해 사실을 입증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제도적 한계를 중심 서사로 삼는다.
작품은 법과 이성의 언어가 지배하는 세계와 피해 경험 이후의 감각적 세계를 대비시키는 구조를 갖는다. 김신록은 “전반부는 성취 중심의 세계라면 후반부는 기억과 감각에 지배되는 세계”라며 “두 세계를 오가는 과정이 가장 도전적이었다”고 말했다.
이번 공연은 1인극 형식으로 진행된다. 약 2시간 동안 휴식 없이 이어지는 구조다. 단일 배우가 서사를 끌고 가는 방식에서 감정과 신체 표현의 비중이 높다.
김신록은 “후반부는 언어로 설명하기 어려운 영역”이라며 “피해를 입증하지 못하는 상황을 몸의 움직임으로 표현하는 데 집중했다”고 설명했다. 언어 중심 표현에서 신체 중심 표현으로 전환한 것이다.
이 작품은 성폭력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면서도 사건 고발에 머무르지 않는다. 법적 판단과 개인 경험 사이의 간극을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춘다. 피해를 입증해야 하는 구조 자체를 질문하는 방식이다.
최근 공연계에서는 사회적 사건을 다루는 작품이 증가하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개인 서사를 중심으로 하면서도 제도와 구조를 함께 다루는 방식이 확장되고 있다.
성폭력 서사를 무대에서 재현하는 문제는 표현 방식과 윤리 기준을 동시에 요구한다. 실제 피해 경험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재현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도 이어지고 있다.
김신록은 “이 작품은 은유 없이 현실을 직면하는 방식”이라며 “관객에게 메시지가 정확하게 전달되기를 바랐다”고 말했다.
동일한 역할을 여러 배우가 연기하는 점도 특징이다. 이자람, 차지연 등이 같은 인물을 맡아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해석한다. 김신록은 “자신은 신체 표현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접근했다”고 설명했다.
‘프리마 파시’는 2019년 호주 초연 이후 한국에서 처음 무대에 올랐다. 공연은 오는 11월 2일까지 서울 충무아트센터 중극장블랙에서 이어진다.
이번 작품은 성폭력이라는 민감한 주제를 다루는 동시에 연극의 재현 방식과 사회적 역할을 함께 묻는다. 무대 위 표현이 현실과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한 질문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