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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이 기억이 됐다”…제주 4·3, 국가폭력과 화해기록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사진:‘제주 4·3 기록물’ 가운데 ‘형무소에서 온 엽서’(왼쪽 사진)와 ‘산림 녹화 기록물’ 중 1970년대 경북 영일만 복구 사업을 기록한 사진. 국가유산청 제공]

제주 4·3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면서, 한국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가 다시 국제적 주목을 받게 됐다. 국가폭력, 냉전, 그리고 진실 규명과 화해의 과정을 담은 기록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유네스코는 2025년 4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집행이사회에서 ‘제주 4·3 기록물’을 세계기록유산으로 최종 등재했다. 희생자 신고서, 구술 증언, 정부 조사 자료 등 1만4000여 건에 이르는 기록이 포함됐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는 “국가 폭력과 진실 규명, 역사적 화해의 과정을 담은 기록”이라고 평가했다.

제주 4·3 사건은 1947년부터 1954년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된 사건이다. 해방 직후 혼란 속에서 시작된 갈등은 1948년 4월 3일 무장 봉기를 계기로 본격화됐고, 이후 군과 경찰, 서북청년단 등이 참여한 강경 진압이 이어졌다.

당시 제주도는 냉전 체제가 형성되는 초기 단계에서 정치적 긴장이 높았던 지역이었다. 남북 분단이 고착화되는 과정에서 좌우 이념 갈등이 격화됐고, 중앙 정부는 이를 ‘반란’으로 규정하며 강경 대응에 나섰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무장 세력뿐 아니라 일반 주민들까지 대규모로 희생됐다는 점이다.

정부 공식 조사에 따르면 4·3 사건으로 희생된 인원은 약 3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제주 인구의 약 10%에 해당하는 규모다. 마을 단위 학살, 집단 처형, 강제 이주 등이 이어졌고, 많은 주민들이 산으로 피신하거나 고향을 떠나야 했다.

오랜 기간 이 사건은 ‘금기’에 가까운 역사로 남아 있었다. 군사정권 시기에는 사건 자체를 언급하는 것조차 어려웠고, 피해자와 유족은 침묵을 강요받았다. 국가폭력에 대한 문제 제기 역시 제한됐다.

전환점은 1990년대 이후였다. 민주화 이후 사회 분위기가 변화하면서 진상 규명 요구가 본격적으로 제기됐고, 2000년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됐다. 이를 통해 국가 차원의 조사와 피해 인정이 시작됐다.

2003년에는 정부가 공식적으로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이후 희생자 신고 접수, 진상조사보고서 발간, 유해 발굴 등이 진행되며 사건은 비로소 공적 기록으로 정리되기 시작했다. 침묵 속에 묻혀 있던 개인의 기억이 사회적 기록으로 전환된 과정이었다.

이번 유네스코 등재는 그 기록의 의미를 국제적 수준으로 확장한 사건이다. 4·3 기록물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보존하는 자료가 아니라, 국가폭력과 인권, 그리고 이후의 화해 과정까지 담고 있다는 점에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특히 다양한 주체가 남긴 기록이 함께 포함됐다는 점이 주목된다. 정부와 군, 미군 자료뿐 아니라 희생자와 유족의 증언, 지역 사회의 기록이 동시에 존재한다. 하나의 사건을 둘러싼 서로 다른 시선이 공존하는 구조다. 이는 진실 규명이 단일한 서사가 아니라 복합적인 과정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유네스코 측은 이러한 기록이 냉전 시기 세계 곳곳에서 발생한 유사한 국가폭력 사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4·3 사건은 단순한 지역 분쟁이 아니라 냉전 체제 형성 과정에서 나타난 구조적 폭력의 사례로 해석된다.

유족들에게 이번 등재는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오랜 시간 인정받지 못했던 피해가 공식 기록으로 남고, 국제사회에서 그 가치가 인정됐다는 점에서다. 김창범 4·3희생자유족회장은 “이번 등재가 상처를 조금이나마 치유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기록은 단순한 과거의 보존이 아니다. 무엇을 기억하고, 어떻게 남길 것인가는 현재의 선택과 연결된다. 4·3 기록물은 국가폭력이 어떻게 발생하고, 그것이 어떤 과정을 통해 사회적으로 복원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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