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질서는 하나가 아니었다”…신간『21세기 지정학』, 서구 중심 서사 흔든다

로마에서 영국, 다시 미국으로 이어지는 흐름. 국제질서를 설명할 때 반복되는 서사다. ’21세기 지정학 – 5000년 문명사를 통해 보는 세계질서의 대전환’은 이 익숙한 전제를 먼저 흔든다. 세계는 한 번도 하나의 중심으로 움직인 적이 없었다는 주장이다. 단일한 패권 서사로 세계를 설명하는 방식 자체가 현실을 축소해 왔다고 본다.
저자 아미타브 아차리아는 국제관계학에서 ‘글로벌 사우스’ 관점을 대표하는 학자다. 인도 출신으로 현재 미국 아메리칸대 교수로 재직 중이며, 국제정치학회(ISA) 회장을 지낸 바 있다. 기존 국제질서 이론이 서구 경험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을 비판하며, 비서구 지역의 역사와 경험을 포함한 새로운 틀을 제시해 온 인물이다. 그의 저서들은 영어권 학계에서 ‘비서구 국제관계론’ 논의를 확장시킨 대표 작업으로 평가된다.
이 책에서도 문제의식은 분명하다. 세계질서를 단일한 흐름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에 대한 반박이다. 서구 중심 역사에서는 패권이 연속적으로 이동해 왔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아차리아는 이 설명이 일부 시기에만 적용된다고 본다. 중국의 조공 체계, 몽골 제국의 확장,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지역을 지배했다. 이들 질서는 동시에 존재했고, 서로 교차했다. 하나의 중심이 모든 지역을 지배한 시기는 오히려 예외적이라는 주장이다.
그는 이를 ‘다중 질서’로 설명한다. 특정 국가가 전 세계를 통제하는 구조가 아니라, 여러 지역에서 각각 다른 질서가 작동하는 상태다. 이 개념은 과거에만 머물지 않는다. 저자는 현재 국제정세 역시 이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본다.
이 지점에서 기존 서구 중심 이론과 충돌한다. 대표적으로 니얼 퍼거슨의 ‘킬러 앱’ 이론이 있다. 서구의 제도와 기술이 다른 문명으로 확산되며 세계를 지배했다는 설명이다. 아차리아는 이를 일방적 전파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서구가 다른 지역에서 형성된 요소를 받아들이고 변형하는 과정이 더 중요했다고 본다.
그는 서구를 ‘교사’가 아니라 ‘학생’으로 다시 위치시킨다. 항해술, 수학, 무역 네트워크 등 주요 요소는 이미 비서구 지역에서 발전해 있었고, 이를 결합하는 과정에서 현대 국제질서가 형성됐다는 설명이다. 이 과정이 지워지면서 서구 중심 서사가 만들어졌다고 본다.
이 책은 해외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영미권 학계에서는 “국제질서를 바라보는 틀을 확장한 작업”이라는 평가가 이어졌고, 일부 평론에서는 기존 국제정치 이론의 한계를 보완하는 중요한 시도로 언급됐다. 특히 비서구 지역의 경험을 이론으로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는 평가다.
이 논의는 현재 국제정세와 직접 연결된다. 미국과 중국의 경쟁이 세계질서를 설명하는 핵심 축으로 부각되고 있지만, 저자는 이를 충분한 설명으로 보지 않는다. 인도, 동남아, 중동, 아프리카 등 다양한 지역이 각자의 방식으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 영역에서도 같은 변화가 나타난다. 공급망은 하나의 중심에 묶이지 않고 지역별로 분산되고 있으며, 안보 협력 역시 다층적으로 구성된다. 국제기구를 중심으로 한 질서와 별개로 새로운 협력 체계가 형성되고 있다. 하나의 틀로 설명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아차리아는 이러한 변화를 ‘전환’으로 본다. 특정 국가의 쇠퇴나 부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질서 자체가 달라지고 있다는 진단이다. 중심이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중심이 여러 개로 나뉘는 방향이다.
’21세기 지정학’은 새로운 답을 제시하기보다 기존의 질문을 다시 묻는다. 세계는 누구의 시선으로 설명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설명이 지금의 현실을 제대로 담아내고 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