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발해’를 숏폼으로 만든다…역사 서사의 전쟁터가 된 대중문화
중국에서 발해 3대 왕 문왕 대흠무를 주인공으로 한 숏폼 드라마가 제작되고 있다. 작품명은 ‘발해 대흠무(渤海大欽茂)’로, 옌볜라디오텔레비전방송국이 제작하며 총 20부작, 전체 분량은 약 100분이다. 지난 8월 21일 중국 지린성 옌볜박물관에서 촬영을 시작했고, 실사 촬영과 인공지능 합성 기술을 함께 활용해 오는 10월 말까지 제작을 마친 뒤 중국 주요 동영상 플랫폼과 TV 채널을 통해 공개할 예정이다.
문제는 이 작품이 발해를 어떤 역사적 틀 안에서 설명하느냐에 있다. 중국 측 공식 소개는 발해 역사를 ‘중화민족 다원일체’를 구성하는 일부로 규정하고, 발해를 당나라와 교류·융합한 지방 민족정권으로 묘사하고 있다. 작품 역시 대흠무가 당의 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이며 이른바 ‘해동성국’을 이뤄가는 과정을 주요 서사로 삼는다.
한국에서 이 대목이 민감하게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발해사가 오랫동안 한중 역사 인식의 쟁점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다. 한국 학계에서는 발해를 고구려 계승성과 말갈계 주민의 결합을 함께 살펴야 하는 고대국가로 연구해 왔고, 중국 학계에서는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에 따라 발해를 중국 동북지역의 지방정권으로 설명하는 경향이 이어져 왔다. 동북아역사재단 역시 중국의 동북공정 이후 고구려와 발해 등 동북지역의 고대사를 중국사에 포함시키려는 서술을 한중 역사문제의 핵심 쟁점으로 다뤄왔다.
그렇다면 이번 작품은 단순한 역사드라마 한 편으로만 봐야 할까.
오히려 눈여겨볼 부분은 역사 인식이 전달되는 매체 자체가 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국가 간 역사 논쟁은 학술논문이나 교과서, 박물관 전시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지금의 대중은 역사책보다 유튜브와 드라마, 숏폼 영상을 통해 과거를 먼저 접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짧은 영상은 역사적 사건을 이해하는 방식까지 바꾼다.
100분짜리 이야기를 20편으로 나누면 한 회 평균 길이는 약 5분이다. 복잡한 국제관계와 정치적 배경, 여러 집단의 이해관계를 긴 설명으로 풀기보다 한 인물과 사건을 중심으로 빠르게 보여주는 방식이 자연스럽다. 대중에게는 접근하기 쉽지만, 역사적 맥락이 단순화될 가능성도 함께 커진다.
‘발해 대흠무’가 흥미로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중국 측은 이 작품을 자국 최초의 발해 역사 소재 미니드라마로 소개하고 있다. 중국 지린성 광전당국이 추진하는 지역 숏폼 제작 사업의 하나이기도 하다. 지역 역사와 문화를 짧은 드라마로 제작해 대중에게 전달하려는 정책과 발해에 대한 중국의 역사 인식이 콘텐츠 안에서 만나는 셈이다.
역사 서사를 대중문화로 만드는 행위 자체는 새로운 일이 아니다. 한국에서도 고려와 조선, 고구려를 소재로 수많은 사극이 만들어졌고, 역사적 사실과 극적 상상력 사이의 경계를 둘러싼 논쟁도 반복됐다.
그러나 숏폼 시대에는 영향력이 작동하는 방식이 달라질 수 있다.
긴 사극을 보기 위해서는 시청자가 상당한 시간을 투자해야 하지만, 몇 분짜리 영상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훨씬 쉽게 소비되고 재편집된다. 드라마의 한 장면이 다시 수십 초짜리 클립이 되고, 그 장면이 별도의 설명 없이 다른 플랫폼으로 이동할 수도 있다.
처음에는 하나의 극적 해석이었던 장면이 반복적으로 노출되면서 실제 역사에 대한 이미지처럼 받아들여질 가능성도 있다.
이 때문에 역사 콘텐츠를 둘러싼 경쟁은 ‘어느 쪽 주장이 맞느냐’는 논쟁뿐 아니라 ‘누가 더 많은 사람에게 자신의 서사를 전달하느냐’의 문제로도 이동하고 있다.
검색창에서 발해를 처음 찾아본 사람이 긴 학술자료보다 드라마 영상이나 숏폼 클립을 먼저 접한다면 그 콘텐츠가 첫 번째 역사 인식의 틀이 될 수 있다. 역사 지식을 전달하는 힘이 연구기관이나 학교에만 머물지 않고 콘텐츠 제작자와 플랫폼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번 작품에 인공지능 기술이 활용된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제작진은 실사 촬영과 AI 합성 등을 이용해 작품을 완성할 예정이다. 역사극은 궁궐과 의상, 군중 장면, 과거 도시의 풍경 등을 재현하는 데 상당한 비용이 들어가는 장르인데, AI를 활용하면 기존보다 낮은 비용으로 시대적 배경이나 시각효과를 구현할 가능성이 있다.
이 변화가 확대되면 과거 대규모 방송사나 영화사만 만들 수 있었던 역사 콘텐츠를 지방 방송국이나 소규모 제작사도 제작할 수 있게 될 수 있다.
콘텐츠 생산의 문턱이 낮아지는 것은 창작 측면에서는 긍정적인 변화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을 다루는 콘텐츠에서는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더 많은 역사 영상이 더 빠르게 생산될수록 그 안에 담긴 해석을 누가 검증할 것인지가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중국 측 보도는 ‘발해 대흠무’의 대본이 지린성 방송 당국의 전문가 검토를 거쳤으며 역사적 사실을 엄격하게 반영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무엇을 ‘역사적 사실’로 규정하는지 자체가 국가와 학계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점이 발해사 논쟁의 핵심이다.
예를 들어 중국 측 작품 소개는 대흠무 시대를 설명하면서 당나라의 예악과 농경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을 강조한다. 물론 발해가 당과 활발하게 교류했다는 사실 자체는 역사 연구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진다. 발해는 당뿐 아니라 신라와 일본 등 주변 국가와도 외교와 교역을 이어갔던 동북아 국제질서의 한 주체였다.
문제는 어떤 관계를 강조하고 무엇을 덜 보여주느냐에 따라 시청자가 받아들이는 국가의 성격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역사드라마는 언제나 선택을 한다. 수십 년의 역사를 몇 시간 안에 담으려면 특정 인물과 사건을 중심에 놓고 다른 요소를 줄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역사 콘텐츠를 볼 때 필요한 것은 극적 표현을 모두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태도보다, 작품이 어떤 시선으로 과거를 재구성하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일이다.
한국의 대응 역시 단순한 비판에 머물러서는 부족하다.
중국에서 발해를 자국 역사 서사의 일부로 다루는 콘텐츠가 나올 때마다 ‘역사 왜곡’이라는 표현으로 반박하는 것은 필요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국제적인 대중의 역사 인식이 바뀌지는 않는다. 더 중요한 문제는 한국이 발해를 세계인이 이해할 수 있는 콘텐츠로 얼마나 적극적으로 설명하고 있느냐다.
발해는 대중문화 콘텐츠로 활용할 수 있는 요소가 적지 않다.
대조영의 건국 과정부터 문왕 대흠무 시기의 발전, 상경용천부를 비롯한 도시문화, 일본과의 외교, 정혜공주와 정효공주 묘에서 확인되는 문화적 특징까지 이야깃거리가 풍부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도 문왕 시기 발해에서 유교적 제도와 지식문화가 발전했으며, 두 공주의 묘지명에서도 당시 발해 지식인의 높은 한문 문화 수준을 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대중이 실제로 접할 수 있는 발해 소재 콘텐츠는 조선이나 고려, 고구려를 다룬 작품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지 않다.
이 차이는 앞으로 더 중요해질 수 있다.
디지털 플랫폼에서는 역사적 주장이 반드시 논문이나 정부 문서의 형태로 확산되지 않는다. 재미있는 드라마와 게임, 웹툰, 숏폼 영상이 수백만 명에게 전달되면서 특정 시대에 대한 이미지가 만들어질 수 있다.
누가 더 설득력 있는 콘텐츠를 만드는가가 역사 인식의 확산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의미다.
그렇다고 한국도 중국의 주장에 대응하기 위한 선전성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역사적 고증을 충실히 하면서도 현대 시청자가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사극의 힘은 교과서 문장을 영상으로 옮기는 데 있지 않다. 당시 사람들이 어떤 선택을 했고, 어떤 도시에서 살았으며, 주변 나라와 어떻게 교류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줄 때 역사는 하나의 살아 있는 이야기로 받아들여진다.
발해를 둘러싼 이번 숏폼 드라마 제작은 그래서 한중 역사논쟁 이상의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앞으로 역사를 어디에서 배우게 될 것인가.
교과서와 박물관의 역할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젊은 세대가 처음 역사를 접하는 통로는 이미 유튜브와 OTT, 게임과 숏폼으로 넓어졌다. 생성형 AI가 콘텐츠 제작비와 시간을 더욱 줄인다면 역사 영상의 생산량도 지금보다 훨씬 빠르게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그 과정에서 대중문화는 단순한 오락을 넘어 역사적 기억을 형성하는 공간이 된다.
‘발해 대흠무’는 오는 10월 말 제작을 마친 뒤 여우쿠를 비롯한 중국의 주요 동영상 플랫폼과 TV를 통해 공개될 예정이다. 실제 작품이 어떤 역사적 장면과 인물을 선택하고, 발해와 당의 관계를 어떤 방식으로 표현할지는 공개 이후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다.
지금 단계에서 분명한 것은 하나다.
역사 논쟁의 무대가 더 이상 학술회의와 교과서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몇 분짜리 드라마와 짧은 영상, 그리고 AI가 만든 장면까지 역사 인식에 영향을 주는 시대가 시작되고 있다.
중국이 발해를 숏폼으로 만들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한국에도 의미를 갖는 이유는 단순히 “중국이 어떤 주장을 했다”는 데 있지 않다.
앞으로 누가 과거를 더 많이 이야기하고, 누가 그 이야기를 더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며, 어떤 서사가 대중의 기억 속에 남게 될 것인가.
역사를 둘러싼 새로운 경쟁은 이미 콘텐츠 안에서 시작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