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4대 기획사가 만드는 ‘팬덤 산업’…패노메논은 K팝의 새 판이 될까
K팝 팬들이 좋아하는 가수를 보기 위해 서울에 온다. 공연을 보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웹툰과 게임을 체험하고 한국 화장품과 패션을 구매한다. 음식점을 찾고 호텔에서 숙박하며 서울 곳곳을 여행한다. 다시 자국으로 돌아가서는 한국 콘텐츠를 소비한다.
정부가 그리고 있는 ‘팬덤 산업’의 그림이다.
이 구상을 현실로 만들 첫 시험대가 2027년 12월 열리는 ‘패노메논(FANOMENON)’이다.
팬(Fan)과 현상(Phenomenon)을 결합한 이름의 이 행사는 내년 12월 2일부터 12일까지 서울 창동 서울아레나와 경기 고양 킨텍스에서 11일 동안 열린다. K팝 공연과 시상식뿐 아니라 영화·드라마·웹툰·게임·애니메이션·푸드·패션·뷰티까지 한데 묶는다. 정부는 외국인 관광객 20만명을 포함해 52만명이 방문하고 1조원 이상의 경제효과를 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규모만 큰 것이 아니다.
하이브와 SM엔터테인먼트, YG엔터테인먼트, JYP엔터테인먼트 등 국내 4대 K팝 기획사는 패노메논을 운영하기 위한 합작법인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의 기업결합 심사도 진행 중이다. 정부와 국내 최대 엔터테인먼트 기업들이 하나의 K컬처 사업을 함께 만드는 보기 드문 구조다.
대중문화교류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은 박진영 JYP 대표 프로듀서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간 구상을 내놨다. 패노메논을 한국의 연례 행사로 정착시킨 뒤 2028년 5월 미국 로스앤젤레스를 시작으로 해외 페스티벌을 열고, 장기적으로 세계 주요 도시에 K컬처 센터를 구축하겠다는 것이다.
정부가 만들려는 것은 결국 축제 하나가 아니다.
K팝에서 만들어진 팬덤을 관광과 소비재, 콘텐츠 수출로 연결하고 그 자체를 하나의 산업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질문도 달라진다.
국가와 4대 기획사가 손잡고 만든 초대형 팬덤 프로젝트는 K팝 산업의 새로운 시장을 열 것인가. 아니면 이미 힘이 센 기업과 아티스트에 더 많은 자본과 관심을 몰아주는 거대한 무대가 될 것인가.
공연이 아니라 ‘팬의 소비 여정’을 판다
패노메논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공연 프로그램이 아니다.
팬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기존 K팝 산업에서 팬은 음반과 공연 티켓, 굿즈를 구매하는 핵심 소비자였다. 패노메논은 여기서 범위를 크게 넓힌다.
해외 팬 한 명이 한국을 방문하면 항공권부터 숙박, 음식, 교통, 쇼핑, 관광까지 소비가 발생한다. 공연을 보기 위해 한국에 왔다가 화장품을 사고, 웹툰을 보고, 게임을 즐기며 다른 한국 브랜드까지 경험할 수 있다.
정부가 말하는 ‘팬덤 산업’은 이 소비를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겠다는 구상에 가깝다.
패노메논 기간 서울아레나에서는 K팝 콘서트와 시상식이 열린다. 공연이 없는 평일에는 팬미팅과 제작발표회, 영상 상영, 게임 공연, 세미나와 비즈니스 포럼 등을 개최한다. 킨텍스에서는 음식과 패션, 게임, 웹툰, 영화, 드라마 등 K컬처 전반을 경험할 수 있는 전시·체험 행사가 진행된다.
공연장 안에서 끝났던 K팝 소비를 도시 전체로 확장하겠다는 전략이다.
산업적으로는 꽤 설득력이 있다.
K팝은 이미 음원과 음반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산업이 됐다. 아티스트의 팬덤은 공연과 캐릭터, 플랫폼, 브랜드 광고, 관광까지 움직인다. BTS나 블랙핑크 같은 세계적 아티스트의 활동이 한국 방문 수요와 소비재 판매에 영향을 주는 현상도 낯설지 않다.
정부가 이 힘을 정책적으로 활용하려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팬덤이 강하다는 것과 국가가 만든 축제가 성공한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52만명·경제효과 1조원…숫자부터 검증해야 한다
정부가 제시한 패노메논의 목표는 상당히 공격적이다.
11일 동안 방문객 52만명. 이 가운데 외국인 관광객만 20만명이다. 경제효과는 1조원 이상을 기대하고 있다.
하루 평균으로 계산하면 약 4만7000명이 행사와 연계 공간을 찾아야 한다. 외국인 방문객은 하루 평균 1만8000명 이상이다.
물론 서울아레나 한 장소에 동시에 이 인원이 들어간다는 뜻은 아니다. 킨텍스와 각종 부대행사, 체험 프로그램 등의 누적 방문객을 합산한 수치다.
그럼에도 첫 행사라는 점을 고려하면 만만한 목표는 아니다.
특히 ‘경제효과 1조원’은 더 세밀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경제효과는 행사 자체 매출과 같은 개념이 아니다. 방문객이 숙박과 교통, 음식, 쇼핑 등에 지출하면서 발생하는 직접효과와 산업 파급효과 등을 포함해 계산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1조원이라는 숫자를 정책 성과로 제시하려면 어떤 방문객 수와 소비액, 체류기간을 전제로 계산했는지 산출 근거가 공개될 필요가 있다.
목표가 클수록 행사 후 평가도 구체적이어야 한다.
실제로 몇 명의 외국인이 패노메논 때문에 한국을 찾았는지, 이들이 며칠을 머물렀고 얼마를 소비했는지, 기존 방한 수요와 신규 수요를 어떻게 구분할 것인지까지 따져야 한다.
‘52만명이 왔다’보다 중요한 것은 패노메논이 없었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소비가 얼마나 만들어졌느냐다.
정부와 4대 기획사가 함께 돈을 버는 구조
패노메논은 정부가 전액 예산을 투입하는 관제 행사도 아니고 민간 기업이 독자적으로 추진하는 상업 페스티벌도 아니다.
대중문화교류위원회는 공익적 목표와 수익성을 함께 추구한다는 구상을 내놨다.
공연은 유료로 운영하고 스폰서십을 통해 수익을 내는 한편, 외국인 팬 유치와 다양한 프로그램에는 정부 예산을 투입할 계획이다. 최휘영 문체부 장관은 투입 자금이 비용으로 끝나지 않고 수익으로 환류하는 구조를 만들겠다는 취지로 설명했다. 박진영 공동위원장 역시 행사가 지속되려면 참여 기업과 아티스트에게 실질적인 이익이 돌아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바로 이 지점이 패노메논의 가장 중요한 정책적 실험이다.
정부는 관광객 유치와 K컬처 확산이라는 공익을 얻고, 민간기업은 공연과 스폰서십, IP 사업에서 수익을 얻는다.
잘 작동하면 민관협력의 좋은 모델이 될 수 있다.
반대로 역할과 돈의 경계가 불투명하면 논란이 생길 수 있다.
정부 예산이 어디까지 들어가는지, 시설과 해외 홍보 비용은 누가 부담하는지, 흥행에 성공했을 때 수익은 어떻게 배분하는지, 적자가 발생하면 누가 책임지는지 명확해야 한다.
특히 참가 주체가 국내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4대 기획사라는 점에서 공공성 기준은 더욱 중요해진다.
공공 지원이 이미 시장지배력이 강한 대기업의 사업 위험을 낮춰주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면 정부 개입의 정당성을 설명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
‘K컬처 축제’인데 왜 4대 기획사가 중심인가
패노메논은 K팝 페스티벌이 아니라 K컬처 전체를 아우르는 축제를 표방한다.
그런데 추진 구조의 중심에는 하이브·SM·YG·JYP가 있다.
네 회사가 세계 K팝 시장에서 가진 영향력을 생각하면 현실적인 선택이기도 하다. 글로벌 팬덤을 움직일 수 있는 정상급 아티스트가 참가해야 외국인 관광객 20만명을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형 기획사가 행사의 핵심 축이 되는 순간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중소 기획사와 신인 아티스트에게 패노메논은 어떤 무대가 될 것인가.
해외 팬덤이 이미 큰 팀을 중심으로 출연진이 구성되고, 행사 흥행을 위해 유명 아티스트에게 공연시간과 홍보가 집중되면 정부가 참여하는 축제가 사실상 대형 기획사의 쇼케이스처럼 보일 가능성도 있다.
최근 관련 업계에서도 이런 우려가 나오기 시작했다.
중소 기획사를 비롯한 일부 업계에서는 대형 기획사가 중심이 된 행사가 ‘그들만의 잔치’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제기되고 있다. 기존 K팝 페스티벌이 시간이 지나며 정체성을 잃거나 특정 인기 스타에 의존했던 전철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출연진 몇 팀을 중소 기획사에서 채우는 데 있지 않다.
패노메논이 공공성을 강조하려면 신인과 중소 기획사, 인디 음악, 비주류 장르가 해외 바이어와 팬을 만날 수 있는 별도의 시장 구조를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
공연장 앞자리보다 산업에 진입할 사다리를 제공해야 한다는 의미다.
시상식까지 만드는 순간 기존 시장과 부딪힌다
또 하나의 논쟁거리는 시상식이다.
패노메논은 한 해 동안 높은 영향력과 활동을 보인 팬덤 10팀을 선정해 시상하는 새로운 방식을 계획하고 있다. 상의 주인공은 아티스트가 아니라 팬덤이며 가수가 팬을 대신해 받는 구조다.
차별화된 아이디어다.
그러나 한국에는 이미 수많은 음악 시상식과 K팝 페스티벌이 존재한다.
한정된 톱 아티스트와 스폰서, 팬의 시간과 지출을 두고 행사가 경쟁하는 시장에서 정부와 4대 기획사가 참여하는 초대형 시상식이 추가되면 기존 민간 행사에 미치는 영향도 생길 수밖에 없다.
업계에서 시상식 분야의 반발 가능성이 거론되는 배경이다.
정부가 민간이 하기 어려운 시장을 만드는 것과 이미 존재하는 시장에 더 강한 경쟁자로 들어가는 것은 정책적으로 다른 문제다.
패노메논이 성공하려면 기존 시상식보다 더 유명한 스타를 모으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팬덤을 시상의 주체로 삼겠다는 새로운 철학과 객관적인 선정 기준, 기존 행사에서 경험할 수 없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부가 만든 또 하나의 연말 K팝 시상식’이라는 평가를 피하기 어렵다.
팬덤을 산업으로 부르는 순간 팬도 달라진다
더 근본적인 질문도 있다.
팬덤을 ‘산업’으로 규정하는 것이 팬에게는 어떤 의미인가.
팬은 강력한 소비자지만 경제적 이익만으로 움직이는 집단이 아니다. 특정 아티스트를 좋아하고 다른 팬과 관계를 맺으며 자발적으로 콘텐츠를 만들고 홍보한다.
K팝이 세계적으로 성장한 과정에서도 팬의 번역과 홍보, 스트리밍, 기부, 커뮤니티 활동은 큰 역할을 했다.
정부와 기업의 입장에서는 이 팬덤이 거대한 경제적 자산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팬의 애정과 자발성을 소비액과 관광객 숫자로만 환산하기 시작하면 반발도 생길 수 있다.
티켓 가격과 팬미팅, 유료 플랫폼, 굿즈 구매가 계속 늘어나면서 K팝 팬 사이에서는 이미 ‘팬심의 과금화’에 대한 피로가 존재한다.
패노메논이 팬덤을 중심에 세우겠다면 팬에게 더 많이 소비하게 만드는 행사보다 팬이 정말 참여하고 싶어 하는 축제가 되는 것이 먼저다.
팬덤에 상을 주겠다는 발상도 같은 기준에서 평가받을 것이다.
팬의 활동을 누가 어떤 데이터로 측정하고, 경쟁과 순위를 만들어내는 과정이 팬덤 문화를 건강하게 만들 것인지도 검토해야 한다.
‘한국판 코첼라’가 되려면 코첼라를 흉내 내서는 안 된다
정부는 패노메논을 설명하면서 자주 ‘한국형 코첼라’를 언급한다.
목표 자체는 이해할 만하다.
세계적인 음악 페스티벌은 공연 티켓을 파는 행사를 넘어 도시와 국가의 문화 브랜드가 된다. 매년 같은 기간 전 세계 팬들이 찾아오고 관광과 숙박, 소비시장까지 움직인다.
한국에도 그런 대표 축제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세계적인 페스티벌은 행정명령이나 스타 섭외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고유한 음악적 정체성과 장소성, 관객 경험이 수년간 쌓이면서 브랜드가 된다.
패노메논이 첫해부터 52만명을 모았다고 해서 세계적인 축제가 완성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정부가 첫해 숫자에 지나치게 매달리면 가장 인기 있는 아티스트를 집중 섭외하고 대규모 관객을 모으는 방식으로 행사가 설계될 위험이 있다.
그러면 방문객 수는 늘 수 있어도 패노메논만의 브랜드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1조원보다 더 중요한 것은 10년 뒤에도 존재하느냐다
패노메논의 진짜 평가는 2027년 12월 12일 행사가 끝나는 날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첫해에는 정부 지원과 4대 기획사의 아티스트 동원력으로 상당한 관심을 끌 수 있다.
더 어려운 것은 그다음이다.
정부가 바뀌어도 계속될 수 있는가. 특정 아티스트가 출연하지 않아도 팬이 찾는가. 기업들이 정부 지원 없이도 돈을 내고 참여하는가. 중소 기획사와 다른 문화산업도 이 행사에서 실제 사업 기회를 얻는가.
이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패노메논은 정책사업을 넘어 하나의 산업이 된다.
정부가 제시한 경제효과 1조원도 중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성공지표는 다른 곳에 있을 수 있다.
패노메논을 찾은 해외 팬이 다시 한국에 오는지, 행사에서 만난 한국 기업이 해외 거래를 만드는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던 아티스트와 콘텐츠가 새로운 해외 팬을 얻는지, 그리고 정부 예산이 줄어든 뒤에도 민간이 이 행사를 계속 운영하려 하는지다.
팬덤은 이미 존재한다.
정부가 새로 만들어야 하는 것은 팬이 아니다.
세계의 팬들이 매년 한국을 찾고 싶게 만드는 이유와, 그 관심이 대형 기획사 몇 곳을 넘어 한국의 다양한 문화산업으로 흘러가는 구조다.
패노메논이 그 길을 만들 수 있다면 ‘한국판 코첼라’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반대로 정상급 K팝 스타와 정부 예산을 한곳에 모아 방문객 숫자만 크게 만든다면 1조원의 경제효과를 기록하더라도 성공했다고 평가하기 어렵다.
팬덤을 산업으로 만든다는 것은 팬에게 더 많은 것을 파는 일이 아니다.
한 사람의 팬심에서 시작된 관심이 공연과 관광, 콘텐츠와 소비재, 다시 새로운 창작과 산업으로 이어지는 생태계를 만드는 일이다.
2027년 패노메논이 시험받는 것도 바로 그 지점이다.
거대한 무대를 만드는 능력이 아니라, 그 무대가 사라진 뒤에도 계속 움직이는 시장을 만들 수 있는가.
한국이 ‘팬덤 산업의 리더’가 될 수 있는지는 그 답에 달려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