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업

방영 끝난 드라마 다시 해외로…AI 더빙이 여는 구작 수출시장

방영이 끝난 드라마가 다시 해외시장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 새 시즌이 만들어진 것도, 리메이크가 결정된 것도 아니다. 달라진 것은 언어다.

AI 미디어 더빙 기업 허드슨에이아이는 지난 8월 19일 SBS와 협력해 ‘펜트하우스’, ‘모범택시’ 등 주요 드라마를 영어와 스페인어로 현지화한다고 밝혔다. 자막 번역부터 음성 분리, 화자 구분, 번역, 음성 합성까지 더빙 과정을 AI 기술로 연결해 해외 유통에 활용하는 방식이다. SBS는 이를 통해 기존 콘텐츠의 영어권과 스페인어권 진출을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주목할 부분은 AI 더빙 기술 자체보다 적용 대상이다. 이미 국내에서 방영을 마치고 흥행 결과까지 나온 기존 드라마가 다시 수출 대상으로 올라왔기 때문이다.

방송사와 제작사에는 수년 동안 축적된 드라마와 예능, 다큐멘터리 라이브러리가 있다. 하지만 과거 작품을 해외에 다시 판매하려면 자막 번역과 더빙, 음향 후반작업, 현지 검수 같은 비용이 들어간다. 신작이라면 해외 판매 가능성을 감안해 처음부터 현지화 비용을 책정할 수 있지만, 오래된 작품은 예상 수익이 크지 않으면 추가 비용을 투입하기 어렵다.

AI 더빙이 문화산업에서 의미를 갖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 새 작품을 더 빨리 번역하는 기술을 넘어, 과거에는 비용 때문에 다시 꺼내지 않았던 콘텐츠를 새로운 시장에 내놓을 가능성을 높이기 때문이다.


방송사 창고에 쌓인 콘텐츠가 다시 상품이 된다

전통적인 더빙은 번역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배우나 성우를 섭외하고 스튜디오 일정을 맞춰 녹음한 뒤, 입 모양과 대사의 길이를 조정하고 음향을 다시 섞는 과정이 필요하다. 언어가 늘어날수록 같은 작업을 반복해야 한다.

최근 현지화 업계가 AI 더빙에 주목하는 이유는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시간과 비용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현지화 업계 자료를 보면 전통적인 더빙 비용에는 성우 출연료뿐 아니라 캐스팅과 스튜디오 사용, 디렉팅, 편집, 수정 작업 등 여러 비용이 포함된다. AI 기반 더빙은 이 가운데 일부 과정을 자동화하고 제작 일정을 단축할 수 있다는 점을 경쟁력으로 내세운다.

이 차이는 신작보다 구작에서 더 중요할 수 있다.

새 드라마는 처음부터 해외 판매를 목표로 제작비를 투입할 수 있지만, 수년 전에 방영된 작품은 어느 나라에서 얼마나 팔릴지 불확실하다. 한두 개 국가를 위해 별도의 더빙 비용을 들이는 것이 수익성이 맞지 않으면 판매 자체를 포기할 수 있다.

반대로 현지화 비용이 내려가면 계산이 달라진다. 예전에는 영어 자막 정도만 제공했던 작품에 스페인어 더빙을 추가하거나, 특정 국가에서 반응이 좋았던 과거 드라마를 다시 현지어로 제작해 판매하는 식의 시도가 가능해진다.

방송사 입장에서는 이미 제작비를 대부분 회수한 콘텐츠가 다시 매출을 만들 수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작품 한 편을 새로 만드는 것보다 기존 라이브러리를 다시 유통하는 비용이 훨씬 적다면, 오래된 드라마의 경제적 수명도 길어진다.


‘신작 수출’ 중심이던 K드라마 유통도 달라질 수 있다

그동안 K드라마 해외 진출은 대체로 신작 중심이었다. 방송 전부터 글로벌 OTT와 판권 계약을 맺거나, 국내 방영 직후 여러 국가에 동시 공급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글로벌 플랫폼이 늘고 각 지역에서 필요한 콘텐츠의 양이 많아지면서 이미 검증된 구작의 가치도 다시 높아질 수 있다.

‘펜트하우스’나 ‘모범택시’처럼 국내에서 흥행성과 인지도를 확보한 작품은 새 작품보다 시장 반응을 예측하기 쉽다는 장점이 있다. 특정 장르가 강한 국가나 배우의 해외 인지도가 높아진 시장을 골라 뒤늦게 다시 판매하는 것도 가능하다.

예를 들어 한 배우가 몇 년 뒤 다른 작품으로 해외에서 인기를 얻으면, 과거 출연작까지 수요가 생길 수 있다. 지금까지는 이 수요에 자막 중심으로 대응했다면 AI 더빙을 이용해 현지 시청자가 선호하는 방식으로 다시 공급할 수 있는 것이다.

스페인어권 시장은 한 번의 현지화로 중남미 여러 국가에 접근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방송사에 매력적인 시장이다. SBS가 이번 협업에서 영어뿐 아니라 스페인어를 함께 선택한 것도 해외 유통 범위를 넓히려는 전략과 연결돼 있다.


현지화 비용이 내려가면 ‘팔 수 있는 작품’의 기준도 낮아진다

콘텐츠 유통에서는 작품 자체의 경쟁력만큼 손익분기점이 중요하다.

더빙 제작에 큰 비용이 들어간다면 해외에서 상당한 매출을 기대할 수 있는 작품만 투자 대상이 된다. 반대로 제작비가 낮아지면 예상 매출이 크지 않은 작품도 시험적으로 시장에 내놓을 수 있다.

AI 현지화가 문화산업에 가져올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도 이 지점이다.

과거에는 몇몇 대형 흥행작에만 다국어 더빙을 적용했다면, 앞으로는 중간 규모 드라마나 예능, 다큐멘터리, 짧은 형식의 콘텐츠까지 현지화 범위가 넓어질 가능성이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도 올해 애니메이션 해외 유통 지원사업에서 현지어 더빙과 자막 재제작을 별도 지원하고 있다. 콘텐츠 해외 진출에서 번역과 더빙이 여전히 중요한 비용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동시에 콘진원은 AI 활용 콘텐츠 제작과 인재양성 사업을 확대하면서 콘텐츠 산업 전반의 AI 도입을 정책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결국 AI 더빙이 비용을 충분히 낮춘다면 기존 정부 지원이나 대형 작품에 집중됐던 현지화 시장 자체가 더 넓어질 수 있다.


무조건 AI로 바꾼다고 좋은 더빙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더빙은 단순히 한국어 문장을 다른 언어로 바꾸는 작업이 아니다.

배우의 감정과 말투, 장면의 분위기를 살리고 현지 시청자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대사를 조정해야 한다. 직역하면 의미가 통하지 않는 농담이나 문화적 표현은 별도의 각색이 필요할 수 있고, 인물 관계에 따라 존댓말이나 말투도 달라져야 한다.

AI 음성이 기술적으로 자연스러워졌다고 해도 이런 맥락까지 완벽하게 처리한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허드슨에이아이는 콘텐츠의 맥락과 인물 관계를 분석하는 방식으로 AI 더빙 기술을 고도화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실제 해외 시청자에게 얼마나 자연스럽게 들리는지는 별도의 문제다.

특히 드라마처럼 감정 표현이 중요한 콘텐츠에서는 어색한 억양이나 번역 하나가 작품 몰입도를 떨어뜨릴 수 있다. 따라서 AI가 초벌 번역과 음성 제작을 담당하더라도 현지 전문가의 검수와 연출은 여전히 중요할 가능성이 크다.

비용을 줄이는 것만 좇다가 작품의 품질을 떨어뜨린다면 장기적으로는 K콘텐츠 브랜드에 오히려 손해가 될 수 있다.


배우 목소리를 AI가 만들 때 권리는 누구에게 있나

AI 더빙이 확대될수록 또 하나의 문제가 커진다. 배우와 성우의 목소리를 어디까지 사용할 수 있느냐는 문제다.

기존 더빙은 현지 성우가 새로운 목소리를 녹음하는 방식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AI 기술을 이용하면 원래 배우와 비슷한 음색을 유지한 채 다른 언어로 말하는 것처럼 만들 수도 있다.

시청자에게는 몰입감을 높이는 기술이지만 배우 입장에서는 자신의 목소리와 연기 특성이 새로운 언어의 음성 데이터로 재생산되는 셈이다.

따라서 AI 더빙이 본격화되면 출연계약 단계에서 목소리의 AI 학습과 합성, 해외 더빙 사용 범위를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지가 더 중요해질 수 있다.

해외에서도 배우와 성우의 AI 음성 복제를 둘러싸고 동의와 보상 문제가 이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배우의 음성과 외형을 AI로 재현할 때 별도 동의와 보상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는 논의가 문화산업 전반에서 커지고 있다.

한국에서도 AI 더빙이 대규모로 활용되기 시작한다면 기술 도입과 함께 출연자의 권리를 어떻게 계약에 반영할 것인지에 대한 기준이 필요해질 가능성이 크다.


구작을 얼마나 갖고 있느냐가 새로운 경쟁력이 될 수 있다

AI 더빙의 확대는 방송사들이 보유한 콘텐츠 라이브러리의 가치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과거에는 오래된 프로그램이 재방송이나 국내 VOD 정도에서 수익을 내는 경우가 많았다. 해외시장에서는 이미 현지화된 일부 인기작만 반복적으로 판매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번역과 더빙 비용이 낮아지면 라이브러리 전체를 다시 평가할 이유가 생긴다.

범죄물은 어느 국가에서 반응이 좋은지, 가족극은 어느 지역에서 소비될 가능성이 있는지, 특정 배우의 과거 작품이 어느 시장에서 다시 주목받는지를 데이터로 분석한 뒤 필요한 작품만 빠르게 현지화해 공급할 수 있다.

방송사가 가진 ‘과거 작품의 양’이 단순한 보관 자산이 아니라 해외 유통을 위한 재고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콘텐츠 제작비가 계속 상승하는 상황에서 이 변화는 더 중요하다. 새 드라마 한 편을 만드는 데 필요한 비용과 위험이 커질수록 이미 만들어진 작품에서 추가 수익을 만드는 전략의 가치는 높아지기 때문이다.

AI 더빙은 결국 제작비를 낮추는 기술만은 아니다. 이미 제작비를 지출한 콘텐츠에서 다시 매출을 만들어낼 수 있게 하는 유통 기술에 가깝다.


AI 더빙의 진짜 승부는 ‘싼 제작’보다 ‘다시 팔 수 있는 작품’

SBS와 허드슨에이아이의 협업은 아직 몇몇 대표 작품을 영어와 스페인어로 현지화하는 단계다. 이것만으로 국내 방송사의 해외 유통 구조가 곧바로 달라진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방향은 흥미롭다.

콘텐츠 시장에서 AI가 주목받을 때 대부분의 관심은 새로운 작품을 얼마나 싸고 빠르게 만들 수 있느냐에 쏠렸다. 생성형 AI가 영상과 음악, 대본을 제작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중심이었다.

더빙에서는 다른 변화가 나타날 수 있다.

새로운 콘텐츠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콘텐츠의 시장을 넓히는 것이다.

수년 전 국내에서 방영을 마친 드라마가 영어와 스페인어로 다시 제작되고, 그동안 비용 때문에 진출하지 못했던 시장에 공급된다면 방송사의 콘텐츠 자산을 평가하는 기준도 달라질 수 있다.

앞으로 중요한 것은 AI 더빙 자체가 얼마나 신기한 기술인가가 아니다.

현지화 비용을 얼마나 낮출 수 있는지, 품질을 어느 수준까지 유지할 수 있는지, 배우와 성우의 권리를 어떻게 보호할 것인지, 그리고 무엇보다 과거 작품에서 실제 해외 매출을 다시 만들어낼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AI 더빙이 그 질문에 답할 수 있다면 방송사의 오래된 드라마는 더 이상 창고에 쌓인 구작이 아니다.

다시 해외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 콘텐츠 자산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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