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전쟁, 다른 구도… ‘부산진순절도’와 ‘동래부순절도’가 남긴 시선
임진왜란을 그린 조선의 전쟁 그림은 전투를 그대로 옮긴 현장 스케치가 아니라, 무엇을 기억하고 누구를 기릴 것인가를 다시 짜는 기억의 장치에 가까웠다. 육군박물관이 소장한 보물 ‘부산진순절도’와 ‘동래부순절도’는 그 점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두 작품은 모두 1592년 왜란 발발 직후 부산 일대 전투를 다루지만, 한쪽은 성곽과 바다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전투의 전개를, 다른 한쪽은 송상현과 동래부민의 충절을 중심으로 사건을 재배열한다. 같은 전쟁을 다룬 기록화라도 무엇을 화면의 중심에 놓느냐에 따라 역사는 다르게 읽힌다.
1592년의 전투를 1760년에 다시 그리다
먼저 짚어야 할 점은 두 작품의 제작 시점이다. ‘부산진순절도’와 ‘동래부순절도’가 묘사하는 사건은 임진왜란이 시작된 1592년 4월의 부산진·동래성 전투지만, 현재 전하는 보물본은 전쟁이 한창이던 때의 제작물이 아니다. 문헌과 국가유산 해설에 따르면 두 그림은 처음에는 동래부사 권이진이 만들게 했고, 그 그림이 낡자 1760년 동래부사 홍명한이 동래 출신 군관 변박에게 다시 그리게 했다.
이 제작 경위는 두 작품의 성격을 바꿔 읽게 만든다. 이 그림들은 단순한 전투 재현이 아니라, 전란 뒤 수십 년 동안 동래 지역에서 축적된 추모와 선양의 사업 속에서 다시 정리된 기억이다. 실제로 동래 일대에서는 송상현과 정발, 순절한 군민을 기리는 사당과 비석, 제향이 이어졌고, 순절도는 그 기억을 눈에 보이게 고정하는 매체였다. 따라서 화면의 사실성만 따질 것이 아니라, 18세기 조선이 임진왜란의 초반 패배를 어떤 윤리로 번역했는지를 함께 봐야 한다.
‘부산진순절도’, 전장의 구조를 보여주는 그림
‘부산진순절도’는 부산진 전투를 다룬다. 국립문화유산연구원 해설에 따르면 이 작품은 비단 세 폭을 이어 만든 대형 화면에 회화식 지도와 부감시를 결합해 부산진성 안팎과 주변 지형을 한눈에 조망하게 했다. 화면 우측에는 부산진성이 놓이고, 대각선 방향의 앞바다는 왜군의 선박으로 가득 차 있어 육지의 성과 바다의 침공 세력이 맞서는 구도가 강하게 드러난다.
이 그림의 핵심은 인물의 내면보다 전투의 압도적 구조에 있다. 1592년 4월 14일 새벽 왜군이 부산진을 에워싸고 공격 준비를 한 일, 첨절제사 정발이 이를 거부하고 결사항전한 일, 왜군이 조총과 큰 칼로 북문을 집중 공격해 성안으로 난입한 일 같은 전투의 흐름이 화면 이해의 중심이 된다. 우리역사넷과 국립진주박물관 설명도 이 그림을 조총, 장창, 왜검으로 무장한 왜군이 성으로 돌입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기록화로 소개한다. 다시 말해 ‘부산진순절도’는 한 사람의 절개를 부각하기보다, 조선군이 맞닥뜨린 군사적 충격과 전세의 급변을 공간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에 가깝다.
이 때문에 ‘부산진순절도’는 패배의 기록이면서도 단순한 비극화로 흐르지 않는다. 바다를 메운 선박, 성곽의 배치, 진입 방향과 공격 양상은 당시 침공의 규모와 속도를 실감하게 만들고, 뒤늦게 회고된 지역의 기억 속에서 부산진 전투가 왜 ‘첫 관문’으로 호출되었는지도 설명해 준다.
‘동래부순절도’, 충절의 인물을 화면 중심에 세우다
반면 ‘동래부순절도’는 같은 침공의 연속선 위에 있으면서도 시선의 중심을 다르게 잡는다. 이 작품 역시 비단 세 폭을 이은 대형 화면에 동래성을 가운데 두고 성 안팎의 전투를 부감시로 묘사했지만, 해설의 무게는 공간보다 인물과 일화에 실린다. 국립문화유산연구원은 이 그림이 여러 시차의 사건을 한 화면에 넣는 이시동도법으로 구성되었고, 송상현의 항전과 순절을 두 차례 반복해 그려 강조했다고 설명한다.
실제로 이 그림에는 왜군의 목판 요구와 이에 대한 조선 측의 응답, 성루 위에서 항전하는 송상현, 객사에서 임금에게 하직 인사를 올리는 송상현, 기와를 던지며 싸우는 평민과 아낙네들, 그리고 무기와 깃발을 버리고 달아나는 이각의 모습이 함께 배치된다. 한 장면 안에 전투, 충절, 배신, 민간의 참여가 층층이 들어가 있는 셈이다. 따라서 이 그림은 단순한 전투도라기보다 ‘누가 끝까지 남았는가’를 묻는 도덕극에 더 가깝다.
같은 왜란 초기의 패배를 다뤄도 여기서는 전황보다 윤리적 대비가 앞선다. 송상현은 화면 안에서 두 번 등장하며 충의의 상징으로 확대되고, 이각은 도주하는 인물로 처리돼 부정적 대조항이 된다. 전쟁 장면을 그렸지만, 실제로는 전쟁을 통해 지역 공동체가 후대에 남기고 싶은 가치 체계를 조직한 것이다.
같은 사건군을 그린 두 작품, 왜 이렇게 달라졌나
두 작품의 차이는 화가 개인의 취향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둘 다 1760년 변박이 다시 그린 세트 그림이고, 둘 다 부산 지역 임진왜란 순절자를 기리는 추모사업의 연장선에서 제작됐다. 그런데도 ‘부산진순절도’가 전장의 배치와 침공의 구조를 더 강하게 드러낸다면, ‘동래부순절도’는 충절의 서사를 정교하게 직조한다. 이는 두 전투가 지역 기억 속에서 맡은 상징적 기능이 달랐기 때문으로 읽힌다.
부산진 전투는 왜란 발발의 첫 충돌이자 침공의 출발점으로 기억된다. 그래서 성과 바다, 선박과 성문, 공격 방향과 병기의 묘사가 사건의 충격을 전달하는 핵심이 된다. 반면 동래성 전투는 송상현이라는 인물, 그리고 군민의 순절과 결부되며 후대의 추모 의식을 조직하는 중심 장면이 됐다. 동래부사들이 관련 고사를 수집하고 사당과 비석, 제향을 마련한 역사까지 감안하면, ‘동래부순절도’가 영웅적·교훈적 구성을 띠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차이는 기록화가 결코 중립적인 복사물이 아니라는 사실도 말해 준다. 두 그림은 모두 실제 지형을 반영하고 무기 표현도 비교적 구체적이지만, 동시에 18세기 동래 지역 사회가 원하는 기억의 형식을 담고 있다. 다시 말해 사실의 기록과 가치의 편집이 한 화면 안에서 동시에 작동한다.
전쟁 그림은 패배를 남기는 방식까지 선택한다
한국 미술사에서 전쟁 그림은 승리만을 기념하는 장르가 아니었다. ‘부산진순절도’와 ‘동래부순절도’는 오히려 패배한 전투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를 둘러싼 선택의 결과물이다. 하나는 침공의 구조와 군사적 압박을 보여주고, 다른 하나는 순절과 충의를 중심으로 사건을 다시 배열한다. 같은 전쟁, 가까운 시기의 같은 지역 사건을 다룬 그림이라도 화면이 택한 중심은 같지 않다.
그래서 이 두 작품은 역사 공부의 보조 자료를 넘어, 문화적 기억이 만들어지는 방식을 보여주는 미술사 자료가 된다. 그림은 사건을 보존하는 동시에 사건의 의미를 새로 정한다. 임진왜란의 초반 장면이 1760년의 붓끝에서 다시 그려졌을 때, 그 전쟁은 더 이상 단지 1592년의 전투가 아니라 조선 후기 지역사회가 후대에 남기고자 한 기억의 형식이 되었다.
자료: 국립문화유산연구원, 국가유산 지식이음 ‘부산진순절도’·‘동래부순절도’;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전쟁의 발발과 조선의 대응’; 국립진주박물관, 문화유산 수어영상 ‘전쟁의 발발과 조선의 대응 부산진순절도’(2024.02.07);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부산진순절도’·‘동래부순절도’;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개관기념 朝鮮時代 眞景山水畵 특별전 우리 땅, 우리의 진경’ 소개문(20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