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낡은 카세트테이프가 사라지면 지역 공연사도 함께 사라진다

낡은 카세트테이프의 디지털화는 단순한 음원 변환 작업이 아니다. 지역 공연의 소리와 현장 맥락, 그리고 그 공연이 어느 장소에서 누구에 의해 어떤 행사로 남았는지를 함께 보존하는 기록 작업에 가깝다. 국가기록원은 2025년 시청각 디지털화 지원센터 안내에서 오디오·비디오테이프가 시간 경과에 따라 열화돼 내용 소실 위험이 높고, 관련 재생장비도 사양화돼 디지털화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오래된 테이프를 그대로 보관하는 것만으로는 기록을 지키기 어렵다는 뜻이다.

이 문제는 추상적인 우려가 아니라 이미 공공 아카이브 안에 실물로 남아 있다. 국립국악원 아카이브에는 이해식이 수집해 2007년 기증한 자료 가운데 1970~80년대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축제 프로그램, 사진, 녹음테이프와 경상도 지방 토속민요 현장채집 기록물 등 약 3003점이 있다. 그중에는 1991년 전남 여수 진남경기장에서 열린 제32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현장채록한 카세트 음향자료도 포함돼 있다. 이 자료는 횡성 우밀 어러리타령과 여수 영당 풍어굿을 한 테이프 안에 담고 있을 뿐 아니라, 기록 장소, 날짜, 주최·주관 정보, 관련 팸플릿과 신문 스크랩까지 함께 연결돼 있다.

이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분명하다. 지역 공연의 기록 가치는 공연 음원 그 자체에만 있지 않다. 같은 테이프라도 행사명이 빠지면 전국 경연대회의 한 장면인지, 마을 의례의 현장 채록인지 구분하기 어렵고, 연행자와 지역 정보가 빠지면 연구와 재공연, 교육 활용의 기반도 약해진다. 디지털화가 필요한 이유는 소리를 파일로 옮기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 소리가 속했던 장소와 시간의 질서를 함께 보존하기 위해서다.


테이프 한 개가 아니라 공연 생태계의 기록


국립국악원의 다른 기증 자료도 같은 점을 보여준다. 백대웅이 1970~80년대에 채집·녹음한 릴테이프와 카세트테이프는 2018년과 2020년 국립국악원에 기증됐고, 자료 소개에는 명인과의 대담, 굿, 민요 등의 현장 녹음이 담겼다고 적혀 있다. 이는 지역 공연과 전승 현장이 상업 음반이나 방송 기록이 아닌 사적 녹음과 현장 채록의 형식으로 남아온 경우가 적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자료는 한 번 손상되면 대체본을 구하기 어렵다. 공연예술은 원고나 악보만으로 완전히 복원되지 않는다. 장단의 속도, 관객 반응, 현장 음향, 진행 순서 같은 요소는 녹음물에 남는 경우가 많다. 특히 지역 축제, 경연대회, 마을굿, 풍어굿처럼 중앙 무대 바깥에서 이뤄진 공연일수록 별도 상업 유통물보다 카세트테이프가 사실상 유일한 원자료가 되기 쉽다.

디지털화가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기록의 연결성 때문이다. 국립국악원 아카이브에서 1991년 여수 경연대회 음향자료는 팸플릿, 원고, 신문 스크랩 같은 연관 기록과 함께 묶여 있다. 이렇게 정리돼야 연구자는 한 지역 공연이 전국 행사 안에서 어떻게 소개됐는지, 어떤 작품이 같은 무대에 올랐는지, 당시의 표기와 오늘의 명칭이 어떻게 다른지까지 추적할 수 있다. 음원 파일만 남기고 설명 정보를 잃어버리면, 디지털화는 보존이 아니라 단순 복사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디지털화가 곧 공개는 아니다


오래된 공연 기록을 디지털로 옮긴다고 해서 곧바로 모두가 온라인에서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국립국악원은 2020년 아카이브 홈페이지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우선 공개 대상은 내용 조사가 비교적 충실한 기록물의 목록과 상세정보, 그리고 국악원이 저작권을 보유한 최근 공연 실황 콘텐츠라고 밝혔다. 다시 말해 디지털화와 온라인 공개는 별개의 단계다. 권리 관계가 불분명하거나 설명 정보가 부족한 자료는 파일로 변환돼도 즉시 서비스되기 어렵다.

이 점은 디지털 아카이브의 성격을 분명히 한다. 아카이브는 플랫폼에 올릴 콘텐츠를 모으는 곳이 아니라, 보존·기술·권리 확인을 거쳐 활용 가능한 상태로 만드는 기반 시설이다. 테이프가 남아 있어도 재생 장비가 없으면 들을 수 없고, 파일이 있어도 메타데이터와 권리 정보가 없으면 연구와 교육, 공공 서비스로 이어지기 어렵다. 디지털화 사업이 음원 추출보다 훨씬 넓은 범위의 기록관리 작업으로 불리는 이유다.


기관의 과제는 복원이 아니라 체계화


공공기관도 이미 이 문제를 장기 과제로 다루기 시작했다. 국가기록원은 2025년 기준 시청각 디지털화 지원센터를 통해 행정기관과 공공기관, 대학교, 비영리단체가 오디오테이프와 비디오테이프를 직접 디지털화할 수 있도록 장비와 공간, 사용 안내를 제공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자료에는 오디오·비디오 테이프 디지털화에 평균 1시간 안팎이 걸린다고 적혀 있다. 녹음 길이만큼 시간이 드는 실시간 작업이라는 뜻이어서, 대량 보존에는 인력과 장비, 일정이 모두 필요하다.

무형유산 분야에서도 단순 이관을 넘어 체계화가 진행 중이다. 관련 공식 자료에는 2022년 무형유산 원천기록물 매체수록 사업으로 무형유산 시청각기록물 음원자료 가운데 카세트테이프 890건을 디지털화하고 메타데이터를 구축했다고 나온다. 또 국가기록원은 최근 시청각 유형별 관리 프로세스와 메타데이터 체계 재구축 연구를 별도로 진행했다. 이제 과제는 개별 테이프를 급히 살려내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어떤 형식으로 기술하고, 원본과 디지털 파일을 어떻게 연결하며, 나중에 누가 다시 찾아 쓸 수 있게 만들 것인지가 핵심이 되고 있다.

결국 낡은 카세트테이프 속 지역 공연을 디지털화해야 하는 이유는 과거의 향수를 저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지역 공연사는 중앙의 대형 공연장 기록만으로 쓰이지 않는다. 여수의 경연대회, 신안의 현장 민요, 보성의 무가, 한 연구자와 채록자가 개인적으로 남긴 녹음까지 함께 살아남아야 비로소 한 시대의 공연 지형이 복원된다. 테이프가 사라지면 소리 하나가 없어지는 데 그치지 않는다. 지역 예술이 어떤 자리에서 누구에게 연행됐는지 보여주는 문화사의 연결 고리도 함께 끊긴다.

자료: 국가기록원, 시청각 디지털화 지원센터 이용안내(2025.03.31); 국립국악원 아카이브, 기증자 백대웅 자료 소개(2026년 10월 확인); 국립국악원 아카이브, 제32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여수) 음향자료 상세(2026년 10월 확인); 국립국악원 아카이브, 국악아카이브 홈페이지 서비스 시작 공지(2020.04.09); 국가기록원, 무형유산 원천기록물 매체수록으로 시청각기록물의 영구보존 및 이용서비스 기반 구축 자료(2023); 국가기록원, 시청각 유형별 관리 프로세스 재정립 및 메타데이터 체계 재구축 연구(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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