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 고전’에서 ‘공주 햄릿’까지, 고전극의 시대는 어떻게 오늘로 옮겨지나
고전극 현대화는 흔히 의상과 배경을 바꾸는 일로 이해되지만, 실제 무대에서 더 크게 바뀌는 것은 작품이 작동하는 사회의 언어와 제도다. 국립극단 아카이브에 남아 있는 세 차례의 ‘햄릿’ 계열 프로덕션, 2001년 ‘햄릿’, 2007년 ‘테러리스트 햄릿’, 2020년 기획돼 2021년 온라인 상영을 거쳐 2024년 무대에 오른 ‘햄릿’을 비교하면 이 점이 선명해진다. 같은 원작이라도 어느 시대를 무대 위로 옮길 것인지는 시대 배경의 재현보다 권력 구조, 인물의 성별 배치, 일상어의 리듬을 어떻게 다시 짜느냐에 더 가까웠다.
국립극단이 2020년 프로그램북에서 정리한 자사 ‘햄릿’ 계보도는 이 변화의 축을 비교적 명확하게 보여준다. 국립극단은 2001년 작품을 창단 51년 만의 첫 ‘햄릿’이자 원작에 충실한 정통 고전으로 소개했고, 2007년 ‘테러리스트 햄릿’은 칼 대신 총을 든 파격적 재해석으로, 2020년 기획작은 동시대 감성을 담은 ‘공주 햄릿’으로 설명했다. 같은 비극의 줄거리를 유지하더라도 무엇을 고정하고 무엇을 바꾸는지가 프로덕션마다 달랐다는 뜻이다.
2001년, 시대를 옮기기보다 고전을 세우는 방식
2001년 국립극단 ‘햄릿’은 아카이브 기록상 정기공연 제192회 ‘세계명작무대’로 제작됐다. 국립극단은 이 작품을 공동주최 기관으로 한국셰익스피어학회를 적시했고, 당시 보도자료 목록에도 ‘원작에 충실한 정통 햄릿’이라는 표현이 반복된다. 프로그램북에 따르면 이 프로덕션은 48명의 배우가 출연하는 대규모 무대였고, 젊은 배우 김석훈이 타이틀롤을 맡았다.
이 시기의 현대화는 고전을 현재 문제로 뒤집기보다 국가 단위 레퍼토리로 정착시키는 데 가까웠다. 원작의 시대를 굳이 다른 시대로 치환하지 않고, 오히려 ‘셰익스피어의 대표 비극을 한국 공공극단이 제대로 올린다’는 제도적 의미를 전면에 놓은 셈이다. 여기서 원작의 시대는 보존의 대상이었다. 현대 관객과의 거리는 해석의 급진성보다 대형 극장의 스케일과 배우 스타성으로 메우는 방식이 우세했다.
2007년, 소품과 무대 문법으로 시간을 당겨오는 방식
2007년 ‘테러리스트 햄릿’은 같은 작품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밀어붙였다. 국립극단 아카이브와 공연사 정리 자료를 보면 이 작품은 독일 연출가 옌스 다니엘 헤르초크가 연출했고, 국립극단은 이를 2008년 다시 재공연했다. 2020년 프로그램북은 이 버전을 ‘칼 대신 총을 든 파격적 햄릿’으로 요약한다.
여기서 시대 이동은 단순한 배경 치환이 아니라 행동 양식의 변환으로 나타난다. 검 대신 총이 등장하는 순간 복수의 형식은 중세 왕가의 결투에서 현대적 폭력의 체계로 넘어간다. 국립극장 무대사 자료는 이 공연이 달오름극장을 변형해 셰익스피어 시대 극장의 돌출무대를 연상시키도록 만들었다고 적고 있다. 겉으로는 현대적 소품을 사용하면서도, 동시에 관객과 배우의 거리를 좁히는 공간 구성으로 원작의 연극성 자체를 다시 불러낸 것이다.
이 지점이 중요하다. 2007년 버전은 원작의 시간을 완전히 폐기하지 않았다. 대신 이야기의 추진력은 현대의 폭력 감각으로 번역하고, 공연의 물리적 구조는 오히려 셰익스피어 시대의 공공성에 접근하는 이중 전략을 택했다. 고전극의 시대를 오늘로 옮긴다기보다, 과거와 현재의 서로 다른 연극 문법을 충돌시키는 방식에 가까웠다.
2020·2021·2024년, 인물의 성별과 일상어를 바꾸는 방식
가장 큰 폭의 이동은 부새롬 연출, 정진새 각색의 최근 ‘햄릿’에서 확인된다. 이 프로덕션은 2020년 대면 공연이 취소된 뒤 2021년 온라인 극장으로 먼저 상영됐고, 같은 창작진의 버전이 2024년 명동예술극장에서 정식 무대에 올랐다. 아카이브 기록상 2024년 공연의 타이틀롤은 이봉련이 맡았고, 국립극단은 2021년 프로그램북에서 이 작업을 ‘왕자 햄릿’이 아닌 ‘공주 햄릿’으로 설명했다.
프로그램북의 ‘원작과 함께보기’ 대목은 이 각색이 무엇을 옮겼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배경 항목은 원작의 ‘12세기 덴마크왕국 엘시노어성’ 대신 ‘어느 때, 어느 곳’으로 바뀌고, 햄릿은 ‘왕위계승서열 1위 해군장교 햄릿 공주’로 설정된다. 오필리어는 남성으로 전환됐고, 햄릿 친구들의 성별도 고루 분배됐다. 시대 이동이 역사적 연도를 특정하는 방식이 아니라, 성별 규범과 권력 승계 규칙이 흔들리는 동시대의 감각을 전면화하는 방식으로 이뤄진 셈이다.
대사의 변화는 더 직접적이다. 원작의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니라”에 대응해 이 버전은 “약한 자여, 그대의 실체는 무엇인가” “약한 자여,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라고 바꾼다. 질문의 방향이 여성 혐오적 일반화에서 정체 규정 자체에 대한 의문으로 이동한 것이다. 햄릿과 호레이쇼의 대화 역시 학교와 역병, 비대면 수업, 거리두기라는 어휘로 재작성된다. 원작의 시대를 오늘로 옮긴다는 말이 여기서는 단순한 배경 업데이트가 아니라, 관객이 지금 실제로 쓰는 언어를 비극의 대사 체계 안에 들여놓는 작업을 뜻한다.
오필리어의 광기 장면을 처리하는 방식도 다르다. 프로그램북 비교표에 따르면 원작에서는 사랑의 상실과 광기의 노래가 중심이지만, 최근 버전에서는 그 노래가 왕실을 조롱하는 동요 형태로 바뀐다. 개인의 파국이 정치적 풍자로 이동하는 것이다. 이것은 고전의 이야기를 오늘의 정서로 번역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비극을 구성하는 감정의 쓰임새 자체를 바꾸는 각색이다.
원작의 시대를 옮긴다는 것은 무엇을 보존하고 무엇을 교체하느냐의 문제
세 프로덕션을 나란히 놓으면 고전극 현대화의 방식은 대략 세 층위로 나뉜다. 2001년은 원작 시대를 크게 건드리지 않은 채 고전의 위상을 현재 제도 안에 세우는 방식, 2007년은 무기와 무대 문법을 바꿔 폭력의 감각을 현재화하는 방식, 2020년 이후 버전은 인물의 성별과 일상어를 다시 짜서 작품의 사회적 운영체계를 동시대로 옮기는 방식이다.
이 비교가 보여주는 결론은 분명하다. 고전극에서 ‘원작의 시대’를 옮긴다는 것은 중세를 현대 복장으로 바꾸는 일이 아니다. 누가 권력을 승계하는가, 누가 취약한 존재로 호명되는가, 비극의 언어가 어떤 일상어를 받아들이는가를 다시 정하는 일이다. 시대 이동의 핵심은 연대가 아니라 규칙의 번역에 있다.
그래서 각색본 비교에서 더 중요하게 봐야 할 것은 배경 설명의 화려함보다 번역과 각색이 건드린 사회적 단위다. 공공극단의 레퍼토리 전략, 국제 협업이 끌어온 무대 문법, 젠더와 팬데믹 이후의 언어가 각각 다른 방식으로 ‘햄릿’을 오늘의 연극으로 만들었다. 고전극의 현대화는 원작을 훼손하느냐 보존하느냐의 이분법보다, 어느 시대의 갈등이 현재 관객에게 가장 선명하게 읽히는가를 두고 벌어지는 선택에 가깝다.
자료: 민주연구원 집단지성센터, 녹서 2025(2025); 국립극단 디지털 아카이브, 햄릿(2001, 서울)·테러리스트 햄릿(2007, 서울)·햄릿(2021, 온라인)·햄릿(2024, 서울) 및 관련 프로그램북·기록물; 국립극장, 공연 목록 및 무대사 정리 자료(20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