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명의료 거부 320만명…고령층 4명 중 1명 ‘사전의향서’ 작성
연명의료를 받지 않겠다는 의사를 사전에 밝힌 국민이 320만명을 넘어섰다.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가운데 임종 결정에 대한 사전 선택이 제도권 안으로 들어오는 흐름이 뚜렷해지고 있다.
19일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에 따르면 2025년 12월 기준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자는 320만1958명으로 집계됐다. 국내 65세 이상 인구 약 1000만명 중 23.7%가 해당 문서를 작성한 것으로 나타났다.
성별로는 여성 비중이 높다. 여성 등록자는 212만2785명으로 남성(107만9173명)의 약 두 배 수준이다. 평균 수명 차이와 가족 돌봄 경험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임종 과정에서 연명의료 시행 여부를 미리 결정해 두는 문서다.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혈액투석 등 치료를 받을지 여부를 선택할 수 있다. 19세 이상 성인은 지정 등록기관에서 상담과 설명을 거친 뒤 작성할 수 있다.
제도 확산 속도는 최근 들어 눈에 띄게 빨라졌다. 2018년 제도 시행 첫해 등록자는 8만6000명 수준에 그쳤다. 이후 2021년 8월 100만명을 넘어섰고, 2023년 10월 200만명을 기록했다. 2025년 8월 300만명을 돌파한 뒤 불과 4개월 만에 20만명 이상이 추가됐다. 도입 8년 만에 40배 가까이 증가한 셈이다.
고령 인구 증가와 함께 임종에 대한 사회적 인식 변화가 맞물린 결과로 해석된다. 통계청에 따르면 한국은 2025년 기준 65세 이상 인구 비중이 20%를 넘는 초고령사회에 진입했다. 평균 수명은 늘었지만 건강수명과의 격차도 유지되면서 임종기 치료에 대한 고민이 커지고 있다.
과거에는 연명의료 중단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다. 의료 결정이 가족 중심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았고, 환자 본인의 의사는 뒤늦게 확인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제도 시행 이후 사전의향서 작성이 늘면서 환자 의사를 중심으로 한 결정 구조가 자리 잡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의료 현장에서도 변화가 감지된다. 사전의향서가 있는 경우 치료 중단 여부를 둘러싼 가족 간 갈등이 줄어드는 사례가 늘고 있다는 설명이다. 상급종합병원 의료진은 “환자의 의사를 사전에 확인할 수 있어 임종 과정에서의 판단 부담이 줄어든다”며 “가족 간 의견 충돌을 줄이는 효과도 있다”고 말했다.
연명의료결정법 시행 이후 병원 내 절차도 정비됐다. 환자 의사를 확인하고 기록하는 과정이 표준화되면서 의료진이 법적 책임을 우려해 과도한 치료를 지속하는 사례도 감소하는 추세다.
다만 제도 이용의 격차는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 현재 사전의향서는 지정 등록기관을 직접 방문해 작성해야 한다. 거동이 불편한 고령층이나 의료 접근성이 낮은 지역에서는 참여가 제한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정보 접근성 문제도 지적된다. 제도에 대한 인지도가 낮은 계층에서는 작성 자체를 고려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장애인이나 외국인 등 다양한 이용자 집단을 위한 안내 체계도 충분하지 않다는 평가가 나온다.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은 접근성 개선을 추진 중이다. 기관 관계자는 “취약계층과 다양한 언어권 이용자를 위한 안내 체계를 확대하고 있다”며 “이용 편의를 높이는 방향으로 제도를 보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사전의향서가 의료 체계 전반과 연계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현재는 개별 문서 작성에 머물러 있지만 향후에는 환자의 장기 치료 계획이나 돌봄 서비스와 연결하는 방식으로 확장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보건의료 정책 연구에서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치료 계획과 연계해 관리할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환자 의사를 중심으로 한 치료 결정 체계 정착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해외에서는 사전의향서와 유사한 제도가 이미 보편화돼 있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리빙 윌(living will)’이나 ‘사전지시서’ 형태로 환자 의사를 기록하고 의료 현장에서 이를 반영하는 체계가 운영되고 있다. 한국도 제도 도입 이후 참여가 빠르게 늘면서 유사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
연명의료에 대한 선택은 개인의 가치 판단과 직결되는 문제다. 치료 지속 여부뿐 아니라 삶의 마무리 방식에 대한 사회적 논의도 함께 확대되고 있다. 제도 이용이 늘수록 의료 현장과 정책 체계 전반에 미치는 영향도 커질 전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