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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과 유영국, DDP 222m 외벽에서 다시 만나다…원작은 미디어파사드에서 어떻게 달라지나

-‘서울라이트 DDP 2026 가을’ 13일까지 진행…백남준·유영국·청구영언을 빛·영상·음악으로 재해석
-222m 비정형 외벽이 거대한 캔버스로 변신…원작의 조형언어는 확장되지만 감상 방식은 크게 달라져
-도시형 미디어아트가 작품의 맥락을 넓히는 동시에 ‘축제적 소비’로 단순화할 가능성도

백남준의 비디오는 텔레비전 화면에서 나왔고, 유영국의 산은 캔버스 안에서 색과 면으로 솟았다. 18세기 사람들이 불렀던 노래는 『청구영언』의 한글 문장으로 남았다. 서로 만들어진 시대도, 담긴 매체도 다른 세 문화자산이 2026년 가을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의 같은 외벽에서 만났다.

서울시와 서울디자인재단이 9월 3일부터 13일까지 여는 ‘서울라이트 DDP 2026 가을’은 백남준과 유영국, 『청구영언』을 DDP 전면부 222m 외벽에 펼치는 미디어파사드 행사다. 백남준과 미디어아트 그룹 버스데이(VERSEDAY)의 《The Break Point》, 유영국과 권하윤의 《내 안의 산을 찾아서》, 『청구영언』과 2GREY의 《말이 빛나는 밤》이 차례로 상영되고, 별도의 레이저 작품과 라이브 공연이 더해진다. 행사는 매일 오후 7시30분부터 10시30분까지 무료로 진행된다.

세 작품을 한 자리에 묶은 것은 단순히 유명한 한국 예술을 소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서울디자인재단이 이번 가을 시즌에 내건 ‘K-Original Light’는 입으로 전해지던 노래가 문자로 기록되고, 산이 추상회화가 되며, 텔레비전이 예술의 언어로 바뀐 순간을 한국 문화의 창조적 전환으로 바라본다. 결국 이번 행사가 다루는 것은 작품 세 편이 아니라 하나의 매체가 다른 매체로 넘어가면서 새로운 표현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백남준을 다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백남준의 방법을 다시 사용한다


《The Break Point》를 이해하려면 먼저 이것이 백남준의 특정 작품을 대형 화면에 옮겨 놓은 전시가 아니라는 점부터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버스데이는 백남준이 비디오와 전자매체를 다뤘던 방식을 가져와 오늘날의 디지털 영상과 건축공간 속에서 다시 풀어낸다.

백남준에게 텔레비전은 완성된 영상을 보여주는 수동적인 상자가 아니었다. 그는 방송 신호를 변형하고 여러 모니터를 결합하면서 당시 가장 대중적인 기술이었던 TV를 예술의 재료로 돌려놓았다. 사람들이 뉴스를 보고 오락을 소비하던 화면을 떼어내 새로운 색과 형태, 리듬을 만드는 도구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그의 작업은 내용보다 매체를 바라보는 태도가 중요했다.

DDP에서는 그 질문이 다른 규모로 이어진다. 브라운관의 테두리가 사라지고 건축물 전체가 화면이 되면서 영상은 더 이상 사각형 안에 머물지 않는다. 건물의 곡면을 따라 끊기고 이어지며 음악과 빛의 변화에 맞춰 움직인다. 백남준이 20세기의 텔레비전을 흔들어 놓았다면 이번 작업은 21세기의 초대형 디지털 스크린을 같은 방식으로 다시 묻는 셈이다.

그래서 《The Break Point》에서 주목할 것은 ‘백남준의 이미지가 얼마나 남았는가’보다 그의 작업방식이 현재의 기술에서 어떻게 변형됐는가에 있다. 백남준을 복제하는 대신 백남준이 했던 것처럼 새로운 기술을 예술의 언어로 전환하려 했다는 데 재해석의 의미가 있다.


유영국의 산은 커진 것이 아니라 다른 공간을 갖게 됐다


유영국의 회화는 산을 그리지만 실제 풍경을 묘사하지 않는다. 산과 능선, 해와 계곡은 붉고 푸른 색면과 삼각형, 직선과 곡선으로 단순화되며 자연은 화면 속에서 새로운 질서로 다시 조직된다. 한국의 산을 그렸다는 설명만으로는 그의 작업이 가진 힘을 충분히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다.

권하윤의 《내 안의 산을 찾아서》는 이 조형언어를 DDP 외벽으로 이동시킨다. 여기서 중요한 변화는 그림이 수십 배 커졌다는 사실보다 유영국의 산을 바라보던 관객의 위치가 달라졌다는 데 있다.

회화 앞에서는 관람자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화면 전체의 균형을 바라본다. 색면 하나가 다른 색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지, 산의 형태가 화면 안에서 어떻게 긴장을 만드는지를 천천히 읽는다. 그러나 222m 외벽에서는 한눈에 전체 작품을 소유하기 어렵다. 거대한 색과 형태가 관람자의 시야를 넘어 건축물을 따라 이어지고, 관객은 작품 앞에 멈춰 있기보다 고개를 돌리고 이동하며 장면을 따라간다.

유영국의 산이 캔버스 안에서 압축된 공간이었다면 DDP에서는 관객이 그 안을 지나가는 공간으로 바뀌는 것이다. 평면에서 건축으로 옮겨가는 순간 작품의 크기만 달라진 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과 작품 사이의 관계 자체가 바뀌었다.


그러나 거대한 화면이 회화의 밀도까지 확대해주는 것은 아니다


미디어파사드가 유영국의 색과 형태를 강렬하게 보여줄 수는 있지만 원작의 경험을 그대로 확대할 수는 없다. 회화에는 화면 크기와 재료, 색을 쌓은 방식, 경계에서 생기는 미묘한 긴장이 있고, 가까이에서 오래 보면서 발견되는 요소가 있다.

야외의 거대한 영상에서는 다른 감각이 먼저 작동한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색과 넓게 움직이는 형태, 건축곡면을 따라 이어지는 장면이 즉각적으로 눈에 들어온다. 회화의 물질성보다 색의 운동과 공간감이 전면으로 나온다.

이는 원작이 훼손됐다는 뜻이 아니라 무엇을 보여줄 수 있는지가 달라졌다는 의미다. 미디어파사드가 회화를 대신하려 한다면 잃는 것이 많지만, 유영국의 색과 산을 처음 만나는 관객에게 원작으로 들어가는 새로운 통로가 된다면 역할은 달라진다.

이번 작품을 평가할 때도 ‘유영국의 그림과 얼마나 똑같은가’보다는 그의 회화가 가진 질서를 다른 매체에서 얼마나 설득력 있게 다시 만들었는지를 보는 편이 더 적절하다.


『청구영언』은 이미 한 번 매체가 바뀐 작품이었다


세 작업 가운데 《말이 빛나는 밤》은 이번 전시의 주제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다.

『청구영언』은 1728년 김천택이 개인 문집에 흩어져 있거나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던 가곡 노랫말 580수를 모아 한글로 기록한 책이다. 애초부터 이 문헌의 역사에는 ‘매체의 이동’이 들어 있다. 소리로 존재하던 노래가 문자로 옮겨졌고, 약 300년 뒤 그 문자가 다시 DDP의 빛과 영상으로 이동한다.

2GREY의 《말이 빛나는 밤》이 흥미로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글 노랫말은 더 이상 책장의 문장으로만 남지 않고 디지털 산수와 함께 건축 위를 흐른다. 글자를 읽는 시간이 영상의 시간으로 바뀌고, 문장의 리듬은 음악과 화면의 움직임 속으로 들어간다.

구전에서 문자로, 문자에서 영상으로 이어지는 이 과정은 문화유산이 시대마다 새로운 매체를 만나 어떻게 살아남는지를 보여준다. 오래된 작품을 현재로 가져오는 일은 원형을 유리관 안에 보존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른 시대의 사람이 그것을 다시 읽을 수 있는 언어를 만드는 일도 문화의 전승에 포함될 수 있다.


다만 노랫말이 아름다운 이미지로만 남으면 『청구영언』은 얇아진다


문학을 영상으로 옮길 때 어려움도 분명하다. 글자는 읽는 데 시간이 필요하고, 한 구절의 의미는 앞뒤 문맥과 함께 만들어진다. 반면 미디어파사드는 수많은 관객의 시선을 짧은 시간 안에 붙잡아야 한다.

이 차이 때문에 오래된 노랫말이 빛과 이미지로 변하는 순간 접근성은 높아지지만 문학적 맥락은 줄어들 수 있다. 관객은 한글 문장의 아름다운 형태를 기억할 수 있지만 그 노랫말을 누가, 어떤 상황에서 불렀으며 당시 사람들의 감정이 어떻게 담겼는지까지 한 번에 알기는 어렵다.

특히 『청구영언』을 ‘한글의 아름다움’만으로 소비하면 작품의 의미는 크게 좁아진다. 이 책의 가치는 오래된 글씨가 예쁘다는 데 있지 않고 당시 사람들이 실제로 부르고 즐겼던 노래와 감정이 문자로 보존됐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말이 빛나는 밤》의 성취도 한글을 얼마나 화려하게 보여주는가만으로 판단하기 어렵다. 영상에서 시작된 관심이 『청구영언』이라는 문헌과 그 안의 노랫말로 다시 이어질 수 있을 때 재해석의 깊이도 커진다.


세 작품을 관통하는 것은 ‘한국적 이미지’보다 기존 문법을 바꾼 태도다


서울디자인재단은 『청구영언』과 유영국, 백남준을 한국 문화의 ‘원형’이라는 틀로 묶었다. 얼핏 보면 세 대상을 함께 놓기가 쉽지 않다. 하나는 조선시대 가집이고, 하나는 20세기 추상회화이며, 다른 하나는 국제적인 비디오아트다.

하지만 표현방식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보면 연결선은 분명해진다.

『청구영언』은 사라질 수 있었던 노래를 문자라는 매체에 붙잡아 놓았고, 유영국은 익숙한 자연을 재현하는 대신 색과 기하학으로 다시 만들었으며, 백남준은 대중매체였던 텔레비전을 예술의 재료로 바꿨다. 모두 기존의 형식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다른 표현방식을 찾아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번 전시가 그들을 ‘K-Original Light’로 묶으려면 바로 이 지점이 중심에 놓여야 한다. 한국적인 문양이나 소재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없던 표현법을 만든 창작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서울디자인재단 역시 세 대상을 관통하는 요소로 각자의 시대와 문화를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보고 다음 시대로 넘어갔던 창조정신을 제시하고 있다.


라이브 공연이 붙으면서 미디어파사드는 ‘상영’보다 ‘공연’에 가까워졌다


올해 서울라이트 DDP의 또 다른 변화는 영상을 반복 재생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일부 작품을 라이브 음악과 연결했다는 점이다. 개막 공연을 비롯해 이디오테잎, 시온, 힙노시스 테라피, 소울스케이프가 참여하며 영상과 음악이 결합하는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이 구성은 미디어파사드의 감상법을 다시 바꾼다. 같은 공간에서 정해진 영상을 바라보는 전시보다 특정 시간에 관객과 음악가, 영상이 함께 만들어지는 공연의 성격이 강해진다.

특히 백남준의 예술을 생각하면 음악과 영상의 결합은 낯선 선택이 아니다. 그는 비디오아트 이전부터 음악과 퍼포먼스에 깊이 관여했고, 장르를 분리하기보다 기술과 신체, 소리를 하나의 사건 안에 놓았다. 그런 점에서 라이브 공연과 결합한 이번 형식은 백남준 작품의 외형보다 그의 작업 태도에 더 가까운 접근으로 읽을 수도 있다.

동시에 위험도 있다. 음악과 레이저, 대형 영상의 강한 효과가 작품의 내용보다 앞서면 관람객에게 남는 것은 작가가 아니라 ‘멋있는 밤 풍경’일 수 있다. 규모와 볼거리가 커질수록 작품을 해석하는 힘도 함께 커져야 하는 이유다.


DDP라는 건물은 이번 전시에서 네 번째 작가에 가깝다


이번 작품들은 어느 건물에서도 같은 모습으로 상영할 수 있는 영상이 아니다. DDP의 외벽이 길고 구부러져 있기 때문에 화면의 이동과 형태가 결정되고, 건축물의 크기가 관객과 작품 사이의 거리를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DDP는 작품을 담는 장소보다 작품을 변형시키는 조건에 가깝다. 영상이 어느 지점에서 꺾이고 어디까지 이어질지, 한 이미지가 얼마나 크게 확장될지에 건축구조가 직접 관여한다.

대형 미디어아트에서 건축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좋은 미디어파사드는 완성된 영상을 건물에 투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건물에서만 가능한 화면을 만든다. 반대로 건축물을 거대한 광고판처럼 사용하면 작품은 규모만 커질 뿐 공간과 관계를 맺지 못한다.

백남준의 화면과 유영국의 산, 『청구영언』의 문장이 DDP를 만났다는 표현도 그래서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이들이 어떤 건물 위에 투사됐는가는 작품을 어떻게 읽을 것인지와 직접 연결된다.


문화유산을 크게 보여주는 것과 새롭게 읽는 것은 다르다


최근 대형 전시와 미디어아트에서는 유명 회화나 문화유산을 몰입형 영상으로 바꾸는 방식이 흔해졌다. 작품이 거대한 벽과 바닥으로 확장되고 음악과 움직임이 더해지면서 원작을 잘 몰라도 쉽게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이미지가 커졌다는 사실만으로 새로운 해석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유명한 작품을 확대하고 움직이게 만드는 데 그친다면 원작을 소비하기 쉬운 형태로 포장했을 뿐일 수 있다.

‘서울라이트 DDP 2026 가을’ 역시 같은 기준으로 볼 필요가 있다. 이번 행사의 의미는 백남준과 유영국의 이름을 얼마나 크게 보여줬느냐가 아니라 그들의 창작방식을 현재의 기술로 어떻게 다시 읽어냈느냐에서 갈린다.

『청구영언』 역시 한글 문장을 아름다운 빛으로 만드는 데서 끝나는지, 구전과 기록이라는 오래된 문화의 흐름을 오늘의 관객에게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지가 중요하다.


원작과 경쟁하지 않을 때 미디어파사드의 역할은 선명해진다


DDP에서 유영국을 본다고 유영국의 회화를 대신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며, 《The Break Point》를 본다고 백남준의 작품을 모두 이해할 수도 없다. 『청구영언』의 문장이 건물 위에서 움직인다고 원문을 읽는 경험이 필요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미디어파사드의 장점은 다른 곳에 있다.

미술관에 가지 않았던 사람이 밤거리를 걷다가 유영국이라는 이름을 처음 만나고, 백남준이 왜 텔레비전을 예술로 만들었는지 궁금해하며, 『청구영언』이라는 책이 1728년에 어떤 노래를 기록했는지 찾아보게 할 수 있다. 원작을 대체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원작으로 향하는 입구가 될 수 있다.

이번 서울라이트 DDP의 성패 역시 얼마나 많은 관객이 휴대전화로 장면을 찍었는가만으로 판단하기 어렵다. 행사가 끝난 뒤 관객의 기억에 ‘빛나는 DDP’만 남는지, 아니면 그 빛의 출발점에 있던 백남준과 유영국, 『청구영언』까지 남는지가 더 중요한 기준이다.


222m 외벽에서 다시 묻는 질문은 ‘원작을 어떻게 현재형으로 만들 것인가’다


‘서울라이트 DDP 2026 가을’에서 세 작품은 같은 방식으로 재해석되지 않는다. 백남준에서는 영상매체를 끊임없이 바꿔온 실험정신이, 유영국에서는 산을 색과 형태로 환원했던 조형언어가, 『청구영언』에서는 소리가 문자로 남았던 기록의 역사가 각각 다른 방식으로 현재와 연결된다.

그래서 이번 행사의 핵심을 ‘전통과 현대의 만남’이라는 익숙한 표현으로 묶으면 오히려 좁아진다. 『청구영언』은 전통이고 백남준과 유영국은 현대라는 식의 단순한 구분도 맞지 않는다.

세 대상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자신의 시대에 익숙했던 표현방식을 그대로 따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노래를 글로 남겼고, 산을 색면으로 바꿨으며, 텔레비전을 예술로 만들었다.

2026년의 미디어아트는 다시 그 결과물을 건축과 디지털 영상, 라이브 음악의 언어로 옮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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