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 위 현대회화의 보존, 화면보다 먼저 재료의 움직임을 읽는다
한지에 그린 현대회화의 보존은 일반적인 유화 복원과 다른 출발점을 요구한다. 화면에 남은 이미지보다 먼저, 그 이미지를 붙들고 있는 종이의 섬유와 수분 반응, 접착제의 수축, 액자와 배접재가 만든 압력과 오염의 경로를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축적해 온 보존 연구와 공개 자료를 보면, 한지는 오래 간다는 통념만으로는 현대회화의 상태를 설명할 수 없다. 같은 한지라도 작가가 어떻게 적시고, 붙이고, 배접하고, 접합했는지에 따라 손상의 양상과 복원 방식이 달라진다.
이 점은 한국 현대미술의 재료사와도 맞닿아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정영렬의 작업 세계를 설명하며 그가 한지 위에 유채로 그리는 방식에서 출발해, 점차 종이의 원료인 닥의 물성과 종이 자체의 형상으로 관심을 옮겨 갔다고 소개한다. 소장품 설명에서도 정영렬의 일부 작업은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요철을 만든 판 위에 종이의 원료를 올려 종이를 형성한 뒤 색을 더하는 방식으로 제작됐다고 밝힌다. 이 경우 보존 대상은 단순한 평면 회화가 아니라, 안료와 종이 지지체가 하나의 구조를 이루는 복합적인 물질이 된다.
한지는 강하지만, 현대회화 안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약해진다
국립현대미술관 보존과학 연구는 한지를 우리 고유의 수록지로 설명하면서, 닥나무 인피섬유의 길이와 강도, 습윤 강도, 유연성, 안료 흡수성 등을 중요한 특성으로 정리한다. 이런 성질은 한지가 회화 바탕재로 널리 쓰일 수 있었던 이유이지만, 현대회화에서는 동시에 새로운 위험이 되기도 한다. 물을 많이 머금은 채 제작되거나, 수성 접착제와 함께 다른 지지체에 결합되거나, 강한 장력을 받는 방식으로 전시될 경우 종이의 팽창과 수축이 화면 전체의 변형으로 이어질 수 있어서다.
보존 현장에서는 바로 이 지점이 문제의 핵심이 된다. 종이는 천처럼 늘어지는 재료가 아니고, 캔버스처럼 장력을 전제로 설계된 지지체도 아니다. 한지가 화면의 주재료가 되는 순간 복원가는 찢김과 결손만이 아니라, 습도 변화에 따른 경화, 접착층의 수축, 뒷면 구조재의 압력, 액자 부재에서 방출되는 오염물질까지 함께 살펴야 한다.
박서보 ‘묘법’ 사례가 보여준 것, 손상은 종이 바깥에서도 생긴다
국립현대미술관이 공개한 보존 사례 가운데 박서보의 1986년작 <묘법 No. 355-86>는 한지를 활용한 현대회화가 어떤 방식으로 변형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작품은 캔버스 위에 한지를 부착해 표면의 형태를 만들고 채색한 작업인데, 보존처리 당시 작품을 지탱하는 뒤쪽 나무틀이 심하게 변형돼 벽에 거는 일조차 어려운 상태였다고 미술관은 설명한다. 미술관은 다량의 수성 접착제 사용으로 인한 캔버스의 과도한 수축과 그에 따른 표면 장력이 틀 변형의 원인으로 보인다고 기록했다.
이 사례에서 중요한 점은 손상이 화면 전면의 찢김이나 박락으로만 나타나지 않았다는 데 있다. 한지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한지가 결합된 전체 구조가 시간이 지나며 뒤틀린 것이다. 당시 보존처리는 기존 가장자리 나무틀을 완전히 없애지 않고 작품의 형태를 안전하게 유지하는 범위에서 돌출 부위를 정리한 뒤, 정확한 치수에 맞는 새 나무틀을 제작해 고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즉 복원의 핵심은 색을 메우는 일이 아니라, 종이와 캔버스, 접착제, 목재가 만들어 낸 장력의 균형을 다시 잡는 데 있었다.
이 사례는 한지를 썼다고 해서 전통 회화와 같은 보존 원칙이 자동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보여준다. 한지 위에 먹이나 안료를 올린 작품과, 한지를 다른 지지체 위에 붙여 표면 구조를 만든 작품은 손상의 원인부터 다르다. 보존처리 역시 재료의 조합과 제작 의도를 먼저 해석한 뒤에야 시작될 수 있다.
복원은 화면을 깨끗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재료의 논리를 되짚는 일
종이 기반 작품의 손상은 외부 장치에서도 생긴다. 국립현대미술관 보존과학 연구는 액자 제작에 사용된 화판틀이나 목재 부재가 작품지 뒷면에 그대로 이염을 남기고, 유리와 액자 부재 사이에 갇힌 휘발성 유기화합물이 종이의 산화와 황변을 일으킬 수 있다고 설명한다. 작품 표면만 보면 얼룩이나 변색처럼 보이지만, 실제 원인은 보관과 전시 구조 전체에 있는 셈이다.
이 때문에 복원 재료 역시 화면의 색과 모양만 맞춘다고 끝나지 않는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종이 조형 보존 사례에서는 경화된 손상부를 미세한 수증기로 유연하게 만든 뒤, 염색한 한지와 소맥전분 풀로 보강하고, 필요에 따라 앞뒤에서 종이를 덧대는 방식이 쓰였다. 이 과정은 미관을 감추기 위한 임시 처치가 아니라, 원재료와 물성이 크게 어긋나지 않는 보강재를 선택해 2차 손상을 줄이기 위한 결정이었다. 종이 작품 복원에서 한지가 여전히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같은 종이여도 섬유 길이와 강도, 흡수성, 유연성이 다르면 보강 뒤의 움직임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국가유산 분야에서도 이런 문제의식은 제도화되고 있다. 국립문화유산연구원은 문화유산 보수·복원 현장에서 사용할 전통 한지의 품질기준 연구를 진행해 보고서를 발간했고, 전달표준과 방법표준, 품질기준을 제시했다. 문화유산 수리와 현대미술 보존은 대상과 목적이 같지 않지만, 복원 재료를 감각이나 관행이 아니라 물성 평가와 기준으로 다뤄야 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의 방향을 보여준다.
2026년 국립현대미술관이 발간물 목록에 올린 보존과학연구 12집에는 종이에 제작된 회화의 손상 유형과 보존처리 방안을 다룬 연구가 포함돼 있다. 같은 해 공사립미술관 보존 지원사업 공모에서도 지류를 별도 지원 분야로 두고 보존처리와 과학분석 비용을 지원 대상으로 제시했다. 한지 위 현대회화의 보존이 더 이상 개별 수복가의 숙련만으로 다뤄지는 영역이 아니라, 재료 분석과 공개 연구, 기관 간 지원 체계 안에서 다뤄지는 분야로 이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결국 한지 위에 그린 현대회화의 복원은 옛 종이를 새것처럼 되돌리는 일이 아니다. 작품이 처음부터 어떤 물질적 긴장 위에 서 있었는지, 시간이 지나며 무엇이 종이를 당기고 밀고 오염시켰는지, 그 흔적을 어디까지 멈추고 어디까지 남길 것인지를 판단하는 과정에 가깝다. 한지가 화면의 바탕이 아니라 화면 자체가 되는 순간, 보존은 이미지의 수선이 아니라 재료의 해석이 된다.
자료: 국립현대미술관, 기증작가특별전 《적멸의 화가, 정영렬》 전시 소개(2014);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설명 「적멸 83-P3」; 국립현대미술관, 『미술 작품의 보존 3』 수록 「현대회화의 캔버스 지지체에 대한 고찰」 및 「근현대 지류작품에 발생하는 갈색 얼룩과 표백처리에 대한 조사」(2017); 국립현대미술관, 발간자료 「미술작품의 보존 12」 목록(2026); 국립현대미술관, 「공사립미술관 보존 지원사업 공모」(2026-04-20); 국립문화유산연구원, 『문화재 복원용 한지의 품질기준 연구 – 본문편 -』 발간 보도자료(2022-03-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