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프랜시스 베이컨과 에곤 실레의 작품에서 찾아본 불편한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

한 사람의 얼굴이 캔버스 위에서 일그러져 있다. 눈과 입은 제자리에 있지 않고, 살갗은 비명을 지르는 듯하다. 얼굴은 얼굴이지만,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얼굴은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표정이라기보다 어떤 고통의 흔적처럼 보이고, 초상이라기보다 무너지는 신체의 순간처럼 보인다. 아름답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쉽게 눈을 뗄 수 없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 앞에서 많은 사람이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불쾌함, 당혹감, 불안, 그리고 설명하기 어려운 끌림. 그의 인물들은 단정하지 않다. 고요하게 포즈를 취하지도 않는다. 몸은 뒤틀리고 얼굴은 뭉개지며, 인간의 형상은 간신히 인간으로 남아 있다. 우리는 그런 그림 앞에서 아름다움이라는 말을 잠시 잃어버린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아름다움이 꼭 편안함과 같은 말이어야 하는지 묻게 된다.
우리는 아름다움을 너무 자주 안정된 이미지로 배워왔다. 균형 잡힌 얼굴, 조화로운 색채, 매끄러운 피부, 잘 정돈된 풍경, 보기 좋은 구도. 아름답다는 말은 대개 안심할 수 있다는 뜻에 가까워졌다. 보는 사람을 편하게 만들고,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불안을 잠시 잊게 해주는 것. 그래서 우리는 아름다운 것을 보면 “좋다”고 말하고, 불편한 것을 보면 “이상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삶은 그렇게 매끄럽지 않다. 인간의 얼굴은 늘 균형 잡혀 있지 않고, 몸은 언제나 건강한 형태로만 존재하지 않으며, 마음은 자주 흐트러진다. 우리는 사랑하면서도 상처를 주고, 살아가면서도 무너지고, 웃고 있으면서도 안쪽에서는 갈라진다. 그런데 예술이 이런 삶을 다루면서 오직 예쁜 얼굴과 평온한 풍경만을 보여준다면, 그것은 정말 삶에 가까운 아름다움일까.
불편한 예술은 우리가 외면한 감각을 되돌려준다. 보기 싫어서 밀어낸 것, 말로 설명하기 어려워 덮어둔 것,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해 감상의 바깥으로 밀어낸 것들이 작품 안에서 다시 나타난다. 베이컨의 뒤틀린 얼굴이 불편한 것은 그것이 단지 기괴해서가 아니다. 그 얼굴 안에 우리가 알고 있지만 보고 싶지 않았던 인간의 불안이 있기 때문이다.

에곤 실레의 인체 드로잉도 그렇다. 그의 인물들은 우아한 신체의 이상형과 거리가 멀다. 팔과 다리는 꺾여 있고, 몸은 앙상하며, 시선은 불안하다. 피부는 매끄러운 표면이 아니라 상처와 욕망이 드러나는 장소처럼 보인다. 실레의 인체는 감상자를 편안하게 맞이하지 않는다. 오히려 묻는다. 인간의 몸은 정말 그렇게 깨끗하고 조화로운 대상인가. 욕망과 불안과 수치심을 지운 몸만이 아름다운 몸인가.
우리가 불편한 아름다움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는 단순하다. 그것은 우리에게 감상자의 안전한 자리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편안한 아름다움 앞에서 우리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다. 좋다, 예쁘다, 훌륭하다, 감탄하고 지나가면 된다. 그러나 불편한 아름다움 앞에서는 그렇게 쉽게 빠져나올 수 없다. 작품은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우리의 감각을 건드리며, 우리가 무엇을 아름답다고 믿어왔는지 의심하게 만든다.
물론 불편하다고 해서 모두 좋은 예술은 아니다. 기괴함만으로 깊이가 생기지는 않는다. 충격을 주는 이미지가 언제나 진실한 것도 아니다. 어떤 작품은 불편함을 사유가 아니라 효과로만 사용한다. 관객을 놀라게 하는 데는 성공하지만, 그 놀라움 뒤에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다. 그런 불편함은 금세 소비된다. 자극은 강하지만 오래 머물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불편함 자체가 아니라, 그 불편함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가이다. 어떤 불편함은 단지 감각을 찌르고 끝난다. 그러나 어떤 불편함은 우리를 더 깊은 곳으로 데려간다. 인간의 고통, 신체의 취약함, 욕망의 모순, 삶의 불안정함을 다시 보게 만든다. 그런 작품 앞에서 우리는 불쾌함을 느끼지만, 동시에 외면할 수 없는 진실에 가까워진다.
아름다움은 어쩌면 완전함이 아니라 긴장에 더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너무 완벽해서 아무 질문도 남기지 않는 이미지보다, 조금 뒤틀려 있어서 우리를 멈춰 세우는 이미지가 더 오래 남을 때가 있다. 균형 잡힌 얼굴보다 흔들리는 얼굴이, 평온한 풍경보다 불안한 장면이, 매끄러운 표면보다 상처 난 표면이 인간을 더 정확히 말할 때가 있다.
우리는 아름다움을 편안한 감정으로만 좁혀왔다. 하지만 아름다움은 때로 불안을 통과해 도착한다. 그것은 우리를 달래기보다 흔들고, 안심시키기보다 낯설게 만들며, 익숙한 감각을 깨뜨린다. 그래서 불편한 아름다움은 쉽게 사랑받지 못한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쉽게 잊히지도 않는다.
예술이 늘 우리를 편안하게 해주어야 한다면, 예술은 삶의 많은 부분을 말하지 못하게 된다. 고통스러운 얼굴, 뒤틀린 몸, 불안한 시선, 무너진 자세, 말하지 못한 욕망과 상처는 아름다움의 바깥으로 밀려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런 것들로도 이루어져 있다. 아름다움이 인간을 말하려 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빛나는 면뿐 아니라 어두운 면까지 감당해야 한다.
불편한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의 실패가 아니다. 그것은 아름다움이 지나치게 예쁨과 안락함에 갇혔을 때, 그 감각을 다시 넓히는 방식이다. 우리가 아름답다고 부르지 못했던 것들 안에도 진실은 있다. 그리고 때로 그 진실은 편안한 아름다움보다 더 오래 우리를 붙잡는다.
아름다움은 언제나 웃는 얼굴로 오지 않는다. 어떤 아름다움은 상처 입은 얼굴로, 뒤틀린 몸으로, 불안한 침묵으로 온다. 우리는 그것을 처음에는 거부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된다. 그것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 이유는 낯설어서가 아니라, 너무 가까웠기 때문이라는 것을.
불편한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의 반대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잊고 있던 아름다움의 다른 얼굴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