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전의 한자어를 쉬운 우리말로 바꾸면 생기는 일…독해는 쉬워져도 법적 뜻은 더 따져야 한다
법전의 어려운 한자어를 쉬운 우리말로 바꾸는 일은 단순한 문장 정리가 아니다. 법제처가 2006년부터 추진해 온 ‘알기 쉬운 법령 만들기’ 사업은 시민의 독해 부담을 낮추는 방향으로 꾸준히 이어졌지만, 모든 말을 곧바로 일상어로 치환할 수는 없다는 한계도 함께 드러냈다. 법은 누구나 읽을 수 있어야 하지만, 같은 단어가 재판과 행정에서 축적해 온 뜻까지 바꿔 버리면 오히려 해석의 혼선이 커질 수 있어서다.
이 충돌은 ‘쉬움’과 ‘정확성’이 서로 반대라는 뜻이라기보다, 법률 언어가 두 층위에서 작동한다는 뜻에 가깝다. 하나는 일반 시민이 처음 읽을 때의 이해 가능성이고, 다른 하나는 법률가와 법원이 오랫동안 같은 뜻으로 써 온 기술적 안정성이다. 쉬운 말로 바꾸는 작업은 전자를 넓히는 일이고, 어떤 용어를 남겨 둘지 결정하는 일은 후자를 지키는 일이다.
20년째 이어진 정비 사업, 효과는 분명했다
법제처는 올해 1월 22일 공개한 ‘알기 쉬운 법령 정비기준 제10판(수정증보판)’에서 이 사업을 최신 기준으로 다시 정리했다. 같은 기관의 사업 개요에 따르면 2006년 ‘알기 쉬운 법령 만들기 5개년 계획’ 이후 2010년까지 법률 977건과 하위법령 1106건이 정비됐고, 이후에도 하위법령과 기본법, 자치법규, 행정규칙으로 대상이 넓어졌다. 2023년부터는 문장과 체계를 더 읽기 쉽게 만드는 사업도 별도로 추진되고 있다.
바뀐 용어는 이미 적지 않다. 법제처가 지난 10월 2일 발표한 20주년 기념 설문 결과를 보면, 시민들이 대표 사례로 꼽은 정비 용어는 ‘사위(詐僞)→거짓·속임수’, ‘개호(介護)→간병’, ‘기왕증(旣往症)→과거 증세’, ‘인터체인지→나들목’ 등이었다. 한자어와 일본식 용어, 전문용어, 외래어가 법조문 안에서 일상적인 말로 옮겨질 때, 독해의 첫 장벽이 실제로 낮아진다는 점을 보여 주는 사례다.
하지만 민법으로 들어가면 문제가 달라진다
충돌이 더 선명하게 보이는 지점은 기본법이다. 법제처는 2013년부터 민법, 형법, 형사소송법, 상법, 행정소송법 같은 기본법을 알기 쉽게 새로 쓰는 정비안을 마련해 관계 부처에 송부했다고 밝히고 있다. 다만 기본법은 조문 수가 많고 판례와 학설, 실무 용법이 오래 축적돼 있어, 단순한 순화가 곧바로 개정으로 이어지기 어렵다.
실제로 2014년과 2017년 민법 일부개정법률안 입법예고 자료를 보면, 법제처는 한자 표기를 줄이고 ‘假住所’를 ‘임시주소’로, ‘窮迫’을 ‘곤궁하고 절박한 사정’으로 고치는 식의 정비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같은 자료에서 ‘선의·악의’, ‘하자’, ‘공작물’, ‘유류분’, ‘참칭상속인’ 같은 용어는 개정 대상에서 제외한다고 설명했다. 학계와 실무계에서 이미 뜻이 확립됐거나 대체어를 쓰면 오히려 다른 의미로 읽힐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였다.
이 대목이 바로 법적 정확성과 독해가 부딪히는 구조다. 일상어에서 ‘악의’는 대체로 나쁜 마음을 뜻하지만, 법률 용어 해설에서 ‘악의’는 보통 어떤 사실을 알고 있다는 뜻으로 쓰인다. 같은 방식으로 ‘선의’도 도덕적 선함이 아니라 어떤 사정을 알지 못했다는 법적 상태를 가리킬 수 있다. 이런 말은 쉬운 표현으로 바꾸려는 순간, 독자가 직관적으로 이해하기는 쉬워져도 종래 판례와 조문 해석의 결이 달라질 위험이 생긴다.
그래서 실제 정비는 ‘전면 순화’가 아니라 ‘선별 치환’에 가깝다
법제처의 정비 기준도 같은 판단을 제도화하고 있다. 원칙은 한글화와 쉬운 우리말 사용이지만, 한글만으로는 뜻이 혼동될 우려가 있는 경우에는 한자를 병기할 수 있도록 했다. 다시 말해 법전의 언어를 모두 생활어로 바꾸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바꿔도 법적 기능이 유지되는 용어와 그렇지 않은 용어를 가르는 일이 핵심이라는 뜻이다.
이 선별 작업은 한 기관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2020년 10월 7일 국회 법제실, 법제처, 국립국어원은 ‘알기 쉬운 법률 만들기’를 위해 협력 체계를 구축했다고 발표했고, 당시 416개 법률용어를 정비 대상으로 뽑아 663개 법률의 일괄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여기에는 어려운 한자어를 고유어로 바꾸는 작업뿐 아니라, 일본식 표현과 권위적 표현을 손보는 작업도 함께 포함됐다. 법률 문장의 문제를 단지 국어 순화나 입법 기술 가운데 하나로만 볼 수 없다는 뜻이다.
결국 법전의 어려운 한자어를 쉬운 우리말로 바꾸는 일은 ‘많이 바꿀수록 좋은가’의 문제가 아니다. 시민이 처음 읽을 때 바로 이해할 수 있는 문장으로 바꾸되, 법적 효과를 가르는 핵심 개념은 함부로 흐리지 않는 쪽으로 조정하는 일이 더 현실적인 목표에 가깝다. 읽기 쉬운 법은 민주주의의 조건이지만, 같은 조문이 사건마다 같은 뜻으로 적용되는 안정성 역시 법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두 조건이 부딪히는 자리에서 법률 언어 개정은 번역이 아니라 해석의 재설계가 된다.
자료: 법제처, 알기 쉬운 법령 정비기준 제10판(수정증보판)(2026.1.22); 법제처, 알기 쉬운 법령 만들기 사업개요(열람 2026.10.22); 법제처, 국민이 직접 뽑은 ‘대표 알기 쉬운 법령 용어’에 “사위(詐僞) → 거짓/속임수” 등 5개 선정(2026.10.2); 법제처, 민법 일부개정법률(안) 입법예고 및 민법(총칙편·물권편·채권편·친족·상속편) 일부개정법률(안) 입법예고(2014, 2017); 법제처, 법령용어해설(악의와 선의)(2009); 법제처, 국회 법제실·법제처·국립국어원 알기 쉬운 법률 함께 만든다(2020.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