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8월 15일은 아는데 8월 29일은 낯설다…광복 뒤에 가려진 국치일

8월 15일은 대부분의 한국인이 알고 있는 날짜다. 광복절이라는 이름으로 공휴일이 지정돼 있고, 매년 정부 기념식이 열리며 독립운동과 해방의 의미를 되새기는 각종 행사가 이어진다.

그로부터 정확히 14일 뒤인 8월 29일은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1910년 8월 29일은 한일병합조약이 공포되면서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본에 넘어간 날이다. 흔히 ‘경술국치일’ 또는 ‘국치일’이라고 부른다. 식민지배 35년의 출발점이 된 날짜라는 점에서 역사적 무게는 결코 작지 않지만, 광복절과 비교하면 대중에게 훨씬 덜 알려져 있다.

올해 민족문제연구소와 식민지역사박물관은 8월 15일부터 29일까지를 ‘기억과 성찰’ 특별주간으로 정하고 독립운동가 후손과의 만남, 친일 문제를 다룬 작가와의 대화, 재일조선인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상영 등을 진행했다. 박물관 측은 이 기간을 1910년 8월 29일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이어진 식민지배 35년을 함께 돌아보는 시간으로 구성했다.

광복절에서 출발해 국치일까지 거꾸로 시간을 이어보는 방식이다.

여기서 하나의 질문이 생긴다.

우리는 왜 나라를 되찾은 날짜는 선명하게 기억하면서, 나라를 빼앗긴 날짜는 상대적으로 잘 기억하지 못할까.


조약을 맺은 날과 나라를 빼앗긴 날은 다르다

경술국치일을 이해하려면 먼저 두 날짜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한일병합조약은 1910년 8월 22일 체결됐다. 당시 대한제국 측에서는 이완용, 일본 측에서는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전권위원으로 나섰다. 조약 제1조에는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일본에 넘긴다는 내용이 담겼다.

하지만 조약은 즉시 공개되지 않았다.

일주일 뒤인 8월 29일 공식적으로 공포됐고, 이 날짜를 기준으로 일본의 식민통치가 본격화됐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도 1910년 8월 29일 한국병합과 관련한 각종 외교·행정 기록이 집중적으로 남아 있다. 당시 대한제국 관보 호외에도 통치권 이양과 병합 관련 문서가 게재됐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8월 29일을 국권을 상실한 날로 기억한다.

8월 22일이 조약 체결의 날짜라면, 8월 29일은 그것이 공식화되고 새로운 식민통치 질서가 시작된 날짜에 가깝다.


광복절은 국가가 기억하고 국치일은 사회가 기억한다

두 날짜의 인지도 차이는 역사적 중요성 때문만은 아니다.

광복절은 국가가 공식적으로 기념하는 국경일이다. 공휴일이고 정부 행사도 열리며 학교교육과 언론보도에서도 매년 반복적으로 다뤄진다.

반면 국치일은 국가 공휴일도 아니고 모든 시민이 의무적으로 기억해야 하는 법정 기념일도 아니다.

대신 시민단체와 역사기관, 지방자치단체 등이 추모와 교육행사를 이어오고 있다.

올해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도 8월 29일을 맞아 박물관 전시에 등장하는 친일 인물을 찾아보고 관련 기록을 직접 작성하는 ‘친일파 기록카드 만들기’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같은 날 재일조선인 여성 3대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호루몽’ 특별상영과 감독과의 대화도 열렸다.

광복절이 국가 차원의 기억이라면, 국치일은 상대적으로 시민사회와 역사교육 현장에서 이어지는 기억에 가깝다.

이 차이가 오랫동안 반복되면서 두 날짜의 대중적 인지도 역시 크게 벌어졌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은 승리의 날짜를 더 쉽게 기억한다

사회가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에는 일정한 선택이 작동한다.

모든 역사적 사건이 같은 강도로 기념되는 것은 아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날, 독립을 이룬 날, 민주주의를 회복한 날처럼 긍정적인 의미를 가진 날짜는 국가 정체성을 만들기 쉽다. 기념식도 축하와 자긍심이라는 형태로 구성할 수 있다.

반대로 패배와 실패, 상실을 기억하는 일은 조금 더 어렵다.

국치일은 말 그대로 나라를 잃은 날이다.

그날을 되돌아보기 위해서는 단순히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만 보는 것이 아니라 당시 대한제국의 정치적 상황과 국제질서, 친일세력의 역할, 이후 식민통치의 전개까지 함께 살펴야 한다.

기억하기 불편한 요소가 많다.

하지만 불편하다는 이유로 덜 기억해도 되는 날짜는 아니다.

오히려 실패의 과정까지 살펴야 광복이 어떤 역사적 무게를 갖는지도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광복만 기억하면 식민지 35년의 시작이 흐려진다

광복절을 1945년 8월 15일의 사건으로만 기억하면 식민지배의 역사가 ‘해방’이라는 결과에 집중될 수 있다.

하지만 그 역사는 1910년 8월 29일 이전부터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일본은 러일전쟁 이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했으며 군대해산과 각종 통제조치를 거치며 지배력을 확대했다. 1910년 병합은 그 과정의 마지막 단계였다.

따라서 국치일을 기억한다는 것은 하루의 사건만 외운다는 의미가 아니다.

어떻게 한 나라의 주권이 단계적으로 약화됐고, 어떤 사람들이 이에 저항했으며, 또 어떤 세력이 식민지배에 협력했는지를 함께 보는 일이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올해 특별주간을 ‘국치일에서 광복절까지’라는 시간축으로 구성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1910년과 1945년을 떨어진 두 사건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 35년의 식민지배와 저항을 하나의 역사로 연결하려는 것이다.


기념일은 단순히 과거를 외우는 장치가 아니다

우리는 흔히 역사기념일을 시험문제처럼 받아들인다.

몇 년 몇 월 며칠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외우고 지나간다.

그러나 기념일의 역할은 날짜를 기억하는 것보다 그 날짜를 통해 현재를 다시 바라보게 하는 데 있다.

광복절은 자유와 독립의 의미를 묻는다.

국치일은 그 자유와 독립을 왜 잃었는지를 묻게 한다.

두 질문은 서로 반대가 아니라 연결돼 있다.

나라를 되찾은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왜 빼앗겼는지를 알아야 하고, 국권을 상실한 역사를 들여다봐야 독립운동의 의미도 더 분명해진다.

올해 특별주간 프로그램 역시 과거만 바라보지 않았다. 8월 29일 상영된 다큐멘터리 ‘호루몽’은 재일조선인의 삶과 일본 사회의 차별 문제를 다루면서 식민지배가 끝난 뒤에도 이어진 차별과 혐오를 현재의 문제로 연결했다.

역사기념일이 현재와 이어지는 지점이다.


‘치욕’만 강조하면 오히려 기억이 멀어질 수도 있다

국치일이라는 이름에는 ‘나라를 빼앗긴 치욕’이라는 의미가 강하게 담겨 있다.

이 표현은 당시 사건이 가진 비극성을 분명하게 드러내지만, 역사교육에서는 한 가지 주의할 점도 있다.

과거를 단순히 부끄러운 사건으로만 기억하면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이 가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식민지배가 시작됐다고 해서 사회 전체가 무기력하게 멈춘 것은 아니다.

국내외에서는 독립운동이 이어졌고, 교육과 문화, 언론, 노동운동을 통해 식민지배에 저항한 사람들도 있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일본의 통치에 적극 협력하거나 식민지 체제 안에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 사람들도 있었다.

국치일을 기억하는 목적도 ‘나라를 잃은 부끄러움’을 반복하는 데 머물 필요는 없다.

어떤 과정으로 주권이 무너졌고, 그 상황에서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했는지를 살펴보는 편이 오늘의 시민에게는 더 의미 있는 역사 공부가 될 수 있다.


8월 15일과 8월 29일을 함께 기억해야 하는 이유

역사는 시작과 끝 가운데 하나만 기억해서는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8월 15일은 식민지배가 끝난 날이고 8월 29일은 그것이 제도적으로 시작된 날이다.

두 날짜 사이에는 35년이라는 시간이 있다.

독립운동과 강제동원, 문화통치와 민족말살정책, 친일과 저항, 그리고 수많은 개인의 삶이 그 시간 안에 들어 있다.

광복절을 기억하는 일은 중요하다.

하지만 광복을 하나의 극적인 결말로만 기억하면 그 결말에 이르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놓치기 쉽다.

국치일을 함께 기억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8월 29일을 또 하나의 기념일로 외우자는 뜻만은 아니다.

나라를 잃었다가 되찾았다는 단순한 문장 사이에 놓인 35년을 다시 바라보자는 것이다.

8월 15일이 우리가 되찾은 것을 기억하는 날이라면, 8월 29일은 무엇을 잃었고 왜 잃었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날이다.

두 날짜를 함께 기억할 때 광복의 의미도 조금 더 선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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