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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교황이 말한 ‘AI 무장 해제’…AI가 인간을 닮아갈수록, 우리는 인간을 다시 물어야

AI가 인간처럼 말하고, 인간처럼 판단하고, 인간의 일을 대신하기 시작한 시대에 교황은 “AI를 무장 해제해야 한다” 고 말했다. 이는 기술을 멈추자는 말이 아니며, 기계를 부수자는 선언도 아니다. 말의 핵심은 더 근본적이다. 기술이 인간의 도구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인간을 다시 정의하는 힘이 될 것인가. 교황 레오 14세가 첫 사회 회칙에서 AI를 인간 존엄과 공동선의 문제로 다룬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바티칸 공식 문헌은 AI가 인간을 섬기기 위해서는 개발자와 사용자, 의사결정자에게 책임이 명확히 부여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도 이 질문 앞에 섰다.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는 최근 AI 태스크포스를 구성하고, 한국 사회와 교회 현실에 맞는 AI 윤리 지침 마련에 들어갔다. 가톨릭평화신문 보도에 따르면 이 TF는 2026년 5월 주교회의 상임위원회 의결로 조직됐고, 김도현 대구가톨릭대 교수 신부도 참여하고 있다.

김도현 신부는 물리학자이자 사제다. KAIST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과학기술의 언어와 신학의 언어를 동시에 이해하는 드문 인물이다. 그가 교황의 ‘AI 무장 해제’를 단순한 기술 윤리 권고로 읽지 않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에게 이 말은 “AI를 쓰지 말자”가 아니라 “기술이 인간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자”는 요청이다.

AI는 이미 편리한 도구의 단계를 넘어섰다. 보고서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상담을 하고, 코드를 짜고, 기사를 요약하고, 사람의 목소리와 얼굴을 흉내 낸다. 이제 인간은 AI에게 명령을 내리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AI에 의해 평가받고, 대체되고, 예측되는 존재가 됐다. 문제는 AI가 인간을 닮아간다는 사실만이 아니다. 더 깊은 문제는 인간 사회가 인간을 점점 AI가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다루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회사는 사람을 역량과 생산성의 단위로 본다. 플랫폼은 사람을 클릭과 체류 시간의 묶음으로 본다. 국가는 사람을 통계와 관리 대상의 집합으로 본다. AI는 이 오래된 시선을 더 빠르고 정교하게 만든다. 인간은 이름을 가진 존재이기 전에 데이터가 되고, 삶을 가진 존재이기 전에 패턴이 되며, 고유한 사연을 가진 존재이기 전에 예측 가능한 변수로 바뀐다.

그래서 AI 시대의 질문은 “기계가 얼마나 똑똑해질 것인가”에 머물 수 없다. 더 중요한 질문은 “인간은 무엇으로 남을 것인가”다.

교황청이 AI를 인간 존엄의 문제로 끌어올린 것도 이 지점 때문이다. 레오 14세는 회칙 발표 자리에서 AI를 무장 해제해야 한다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선택했다고 밝혔다. 강한 표현이지만, 지금의 시대가 사람들의 의식을 깨우는 언어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라는 취지였다. 그는 AI가 지배와 배제, 전쟁의 논리에 묶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이 말이 중요한 이유는 AI가 특정 영역의 기술이 아니라 인간 삶의 거의 모든 영역으로 스며들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시장에서는 자동화가 인간의 자리를 빠르게 흔들고 있다. 기업은 효율을 말하고, 시장은 생산성을 말한다. 그러나 그 효율의 바깥에는 밀려난 사람의 생계, 자존감, 관계, 미래가 있다. 해고는 숫자로 발표되지만, 그 숫자 하나하나에는 삶의 붕괴가 들어 있다.

전쟁터에서는 문제가 더 심각하다. AI는 판단의 속도를 높이고, 표적 식별을 자동화하며, 인간이 망설여야 할 순간을 기술적 처리 과정으로 바꿀 수 있다. 인간의 망설임은 때로 비효율로 보인다. 그러나 전쟁에서 그 망설임은 윤리의 마지막 흔적일 수 있다. 기계가 더 빨리 판단할수록, 우리는 더 깊이 물어야 한다. 죽음의 결정에서 인간의 책임은 어디에 남는가.

환경 문제도 피할 수 없다. 생성형 AI는 눈앞에서는 가볍게 작동한다. 질문을 입력하면 몇 초 만에 답이 나온다. 그러나 그 짧은 응답 뒤에는 거대한 데이터센터와 전력 소비, 냉각 설비, 자원 사용이 있다. AI는 비물질적인 지능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물질적인 기반 위에서 움직인다. 편리한 답변 하나가 지구적 비용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렇다고 이 글의 결론이 기술 공포여서는 안 된다. AI는 이미 의료, 교육, 연구, 돌봄, 행정, 창작의 영역에서 의미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문제는 AI의 존재가 아니라 AI를 둘러싼 세계의 방향이다. 기술이 인간을 돕는가. 아니면 인간을 효율화의 재료로 만드는가. AI가 인간의 시간을 넓히는가. 아니면 인간에게서 시간의 의미를 빼앗는가. AI가 더 많은 사람에게 기회를 주는가. 아니면 권력과 자본을 가진 소수에게 더 큰 통제력을 주는가.

바티칸 회칙은 AI 개발의 주도권이 초국적 민간 기업에 집중되고 있다는 점도 우려한다. 이 기업들은 때로 정부보다 더 많은 데이터와 자본, 기술 인프라를 갖는다. 기술 권력이 공적 통제보다 빠르게 커질 때, 인간 존엄은 선언만으로 지켜지지 않는다.

여기서 교황의 말은 종교적 울타리를 넘어선다. “AI 무장 해제”는 신앙인의 언어이기 전에 시민의 언어다. 그것은 기술을 인간의 손 안에 다시 놓자는 말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을 기술의 기준에 맞춰 줄이는 세계를 멈추자는 말이다.

우리는 이미 인간을 너무 쉽게 기능으로 부른다. 노동자는 인력이고, 학생은 성적이고, 환자는 진료 데이터이며, 소비자는 구매 패턴이다. AI는 이런 분류를 더 빠르게 수행한다. 하지만 인간은 인력보다 크고, 성적보다 크고, 데이터보다 크다. 인간은 계산될 수 있지만 계산으로 끝나지 않는다. 예측될 수 있지만 예측으로 다 설명되지 않는다. 분석될 수 있지만 분석의 결과와 동일하지 않다.

AI가 인간을 닮아갈수록, 우리는 인간을 다시 물어야 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존엄은 어디에서 오는가. 인간의 노동은 단지 생산량인가. 인간의 판단은 속도와 정확도로만 평가될 수 있는가. 인간의 약함, 느림, 망설임, 슬픔, 후회, 사랑은 AI 시대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

어쩌면 AI 시대에 가장 낡아 보이는 것들이 가장 인간적인 것일 수 있다. 기다리는 능력, 망설이는 책임, 타인의 고통 앞에서 멈추는 마음, 숫자로 환산되지 않는 존엄을 알아보는 감각. 기술은 이 모든 것을 비효율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문명은 바로 그 비효율 위에서 인간다움을 지켜왔다.

교황이 말한 ‘AI 무장 해제’는 기계를 향한 명령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을 향한 질문이다. 우리는 기술을 얼마나 발전시킬 수 있는가가 아니라,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을 얼마나 더 깊이 지켜낼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AI는 앞으로 더 인간처럼 말할 것이다. 더 자연스럽게 대답하고, 더 정교하게 판단하고, 더 많은 일을 대신할 것이다. 그러나 그럴수록 인간은 자신을 더 분명히 말해야 한다. 인간은 데이터셋이 아니다. 인간은 생산성의 단위가 아니다. 인간은 대체 가능한 기능의 묶음이 아니다.

AI를 무장 해제한다는 것은 기술의 전원을 끄는 일이 아니다. 인간을 계산 가능한 존재로만 보는 세계의 시선을 내려놓는 일이다. 그리고 그 일은 기계가 아니라 인간만이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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