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한국 초연의 셰익스피어, 무대에 오르기 전 서막부터 사라졌다
한국에서 셰익스피어가 무대에 안착한 방식은 완역본의 충실한 재현보다, 먼저 공연 가능한 텍스트로의 재편에 가까웠다. 그 점이 또렷하게 드러나는 사례가 1964년 5월 국립극장 명동관에서 오른 극단 산하의 <말괄량이 길들이기>다. 국립극단 디지털 아카이브는 이 공연을 이 작품의 한국 초연으로 정리하고 있고, 같은 작품의 한국 발표매체로는 양문사에서 1959년에 나온 번역본을 적고 있다. 인쇄된 한국어 텍스트가 먼저 나오고, 무대는 몇 해 뒤 다른 번역과 연출의 손을 거쳐 초연된 셈이다.
원문에는 있는 서막, 한국 초연 기록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셰익스피어 원문에서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곧바로 본 줄거리로 들어가지 않는다. 폴저 셰익스피어 도서관의 디지털 텍스트를 보면 이 희곡은 ‘Induction’ 1장과 2장, 곧 크리스토퍼 슬라이가 등장하는 서막으로 시작한 뒤에야 1막으로 넘어간다. 그런데 아르코예술기록원 소장 자료를 정리한 목록에는 1964년 공연 포스터가 ‘말괄량이 길들이기 : 5막 12장’으로 남아 있다. 이 표기가 원문 전체의 장면 구성을 그대로 따른 것이 아니라면, 한국 초연 단계에서 가장 먼저 탈락한 것은 슬라이의 서막이었다고 보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 차이는 사소한 축약이 아니다. 원문의 서막은 한 술주정뱅이에게 귀족의 정체성을 덧씌운 뒤 그 앞에서 한 편의 연극을 보여주는 장치다. 다시 말해 관객은 ‘길들이기’의 이야기를 바로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누군가에게 보여지는 극중극의 틀 안에서 보게 된다. 이 틀이 빠지면 남는 것은 카타리나와 페트루키오의 대결과 혼인, 그리고 훈육의 서사다. 한국 초연 기록이 가리키는 변화는 단순한 분량 조절이 아니라, 작품의 해석 틀을 먼저 걷어낸 편집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초연은 번역의 완성보다 축전의 무대 문법 속에서 만들어졌다
1964년 공연은 단독 사건이 아니라 셰익스피어 탄생 400주년 기념 축전의 일부였다. 관련 연구에 따르면 그해 4월 22일부터 5월 23일까지 국립극장과 드라마센터에서 모두 8편의 셰익스피어 공연이 이어졌고,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그 가운데 국립극장 무대의 마지막 순서였다. 같은 연구는 준비 과정에서 이 작품의 번역과 연출 계획이 바뀌었고, 최종적으로는 이효영 번역, 차범석 연출의 형태로 공연이 진행됐다고 정리한다. 초연이 한 명의 번역자가 오랜 시간 다듬은 정본의 무대화라기보다, 축전 일정과 극단 운영, 동시대 연출 감각이 함께 작동한 결과였다는 뜻이다.
이 맥락을 보면 왜 서막 같은 장치가 먼저 밀려났는지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축전은 여러 극단이 같은 기간 안에 국립극장 무대를 이어 쓰는 방식으로 운영됐고, 연구자는 이를 두고 동일한 기본 무대와 제한된 전환 조건 속에서 공연들이 구성됐다고 설명한다. 서막을 살리는 일은 단지 대사를 더 넣는 문제가 아니라, 작품 전체를 ‘이야기 바깥의 이야기’로 받쳐주는 추가 프레임을 무대적으로 설계하는 일이다. 축전형 공연 문법에서는 이런 층위가 본 줄거리보다 후순위로 밀렸을 가능성이 높다.
왜 셰익스피어 번역은 늘 다시 쓰이게 되는가
이 사례는 원전 번역이 왜 한국어 안에서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지도 보여준다. 셰익스피어 번역사 연구는 한국어 번역의 출발점을 1919년으로 잡으면서, 이 텍스트가 문학이면서 동시에 공연 대본이고,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운문이라는 점 때문에 번역의 난도가 특별히 높다고 설명한다. 같은 연구는 1960년대에 김재남의 번역으로 <뜻대로 하세요>와 <말괄량이 길들이기>가 한 권으로 출간됐다고 정리하지만, 정작 1964년 축전 무대의 최종 번역자는 이효영으로 기록돼 있다. 읽는 번역과 올리는 번역이 쉽게 일치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한국의 셰익스피어 수용사는 번역본의 출간 연표만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다. 같은 작품이라도 출판된 번역, 공연을 위해 다시 손본 번역, 공연 기록에 남는 장면 구성은 서로 다른 층위에 속한다. 이번에 확인된 1964년 <말괄량이 길들이기> 초연 자료는 그 차이를 압축해서 보여준다. 한국어로 먼저 출판된 텍스트가 있었지만, 무대는 다른 번역을 택했고, 그 무대는 다시 원문의 서막을 덜어내는 방식으로 작품을 재조립했다.
원전을 한국어로 잘 옮기기 어려운 이유를 하나만 꼽기는 어렵다. 다만 셰익스피어의 경우에는 난해한 어휘나 시적 리듬만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판본을 바탕으로 누구를 위해 번역하느냐가 늘 함께 따라붙는다. 학계가 번역 자체를 부차적인 일로 여겨서가 아니라, 번역과 공연, 수용사의 층위가 워낙 복잡하게 얽혀 있어 한 편의 ‘정답’을 세우기 어렵기 때문이다. 1964년 한국 초연 자료가 보여주는 것은 바로 그 지점이다. 한국의 셰익스피어는 원문을 옮기는 순간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지울지 결정하는 순간부터 이미 다시 쓰이고 있었다.
자료: 국립극단 디지털 아카이브, 말괄량이 길들이기 작품 항목; 아르코예술기록원 소장 자료 목록, 차범석 관련 기록물 정리 문서(2023); Folger Shakespeare Library, The Taming of the Shrew 디지털 텍스트; 이영석, 「1960년대, 연극을 통한 동시대성의 욕망―셰익스피어 탄생 400주년 기념 축전을 중심으로」(2022); 권오숙, 「셰익스피어 한국어 번역 100년사: 번역 현황과 번역 태도의 변화 연구」(20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