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판된 책은 어떻게 돌아오나…복간을 가르는 건 수요보다 계약이다
절판된 책의 복간은 출판사가 인쇄를 다시 돌리면 끝나는 일이 아니다. 책이 다시 시장에 나오려면 먼저 그 책을 누가 어떤 조건으로 낼 수 있는지부터 다시 확인해야 한다. 실제 현장에서는 독자 수요보다 먼저 권리 상태, 옛 계약의 존속 여부, 새 판본이 어디까지 바뀌는지 같은 법적·실무적 조건이 복간의 성패를 가른다.
출판계에서 ‘복간’은 통상 절판된 책을 다시 내는 일을 가리키지만, 법적으로는 훨씬 더 세분된다. 단순 재인쇄인지, 개정판인지, 초판의 형태를 되살린 복각본인지, 번역을 새로 한 신판인지에 따라 필요한 권리와 계약이 달라진다. 같은 제목의 책이라도 어떤 판본을 다시 살리는지에 따라 협의해야 할 상대와 범위가 달라진다는 뜻이다.
복간의 첫 관문은 ‘책이 아니라 권리’다
현행 저작권법은 저작물을 인쇄 등으로 발행할 수 있는 출판권을 계약으로 설정하도록 두고 있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표준계약서 해설과 저작권법 체계에 따르면, 특약이 없을 때 출판권이나 배타적발행권의 존속기간은 대체로 3년을 기준으로 본다. 반대로 계약이 자동 연장되거나, 전자책·오디오북·해외판권까지 한꺼번에 묶여 있으면 절판 뒤에도 권리가 곧장 원저작자 쪽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복간을 추진할 때 출판사가 가장 먼저 보는 것은 판매 추정치가 아니라 권리의 현재 상태다. 옛 출판사가 아직 유효한 권리를 갖고 있는지, 저자나 상속인이 권리를 회수했는지, 번역가·해설자·삽화가의 권리는 별도로 남아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최근 한국저작권위원회가 소개한 2025년 서울고등법원 판결도 계약서 제목이 ‘출판권 설정’이라고 적혀 있어도 실제 조항 내용에 따라 저작권 양도로 해석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표준계약서가 중시하는 항목도 이 대목에 모여 있다. 존속기간, 발행 시기, 저작권 사용료, 중쇄 조건, 계약 종료 뒤 재고 처리, 권리 등록 말소 같은 조항이 정리되지 않으면 복간은 바로 분쟁으로 넘어갈 수 있다. 절판 상태라는 사실만으로 자동 해지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복간을 어렵게 만드는 이유다.
새 판본일수록 재계약 범위는 넓어진다
복간이 단순한 ‘다시 찍기’가 아닐수록 재계약 범위는 넓어진다. 종이책만 다시 내는지, 전자책까지 함께 내는지, 새로운 번역을 붙이는지, 당시 검열이나 편집으로 빠진 부분을 복원하는지에 따라 필요한 권리가 달라진다. 종이책 출판권이 있다고 해서 전자책 제작권까지 자동으로 따라오는 구조는 아니라는 점도 표준계약서 해설이 따로 짚는 부분이다.
해외 저작물은 더 복잡하다. 국내 출판사는 원저작물 이용 허락, 번역과 편집에 대한 권리, 국내 유통 범위, 디지털 판형 사용 여부를 다시 정리해야 한다. 결국 복간은 제목 하나를 되살리는 일이 아니라 과거 계약을 현재 시장의 유통 방식에 맞게 다시 설계하는 과정에 가깝다.
사례 1: 공공영역에 들어간 고전의 복간
2026년 8월 푸른사상은 한용운의 시집 ‘님의 침묵’ 출간 100주년 기념 복간본을 예고했다. 이 경우 핵심 조건은 매출보다 저작권 보호기간의 종료 여부였다. 한용운은 1944년에 사망했기 때문에 현행 저작권법의 사후 70년 기준으로 보면 저작재산권 보호기간은 2014년 말에 끝났고, 2015년부터는 본문 텍스트 자체가 공공영역에 들어간 상태다.
이런 책의 복간은 아직 보호기간 안에 있는 책과 구조가 다르다. 출판사가 본문 사용을 위해 상속인과 새로 출판권 계약을 맺을 필요는 작지만, 어떤 초판본을 저본으로 삼을지, 표지와 장정, 사진이나 해설 원고처럼 새로 덧붙는 요소의 권리는 누구에게 있는지를 따져야 한다. 즉 공공영역의 고전이라도 ‘아무 책이나 그대로 다시 내면 된다’는 뜻은 아니다.
사례 2: 아직 보호기간 안에 있는 해외서의 복간
한빛비즈가 2019년 다시 낸 어니스트 베커의 ‘죽음의 부정’은 다른 경우다. 출판사 소개에 따르면 이 책은 국내 초판 출간 12년 만에 새 번역으로 복간됐다. 이미 수요가 확인된 절판서였지만, 복간의 실제 조건은 권리 만료가 아니라 보호기간 안에 있는 해외 저작물을 어떤 조건으로 다시 계약하느냐에 있었다.
베커는 1974년에 사망해 한국 기준으로 저작재산권 보호기간이 2044년 말까지 이어진다. 따라서 이 책의 복간은 단순 재고 소진이나 재인쇄가 아니라 원권리자와의 이용 허락 관계, 번역자 계약, 국내 판본의 형태를 다시 정비하는 재계약 작업을 전제로 한다. 절판서의 두 번째 생애가 시장 반응보다 권리 정리에 더 크게 좌우된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다.
사례 3: 복원이 포함된 복간은 더 복잡하다
2023년 문학동네에서 나온 ‘고우영 열국지’ 무삭제판은 복간이 복원 작업과 결합할 때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 보여준다. 유통 정보에 따르면 이 판본은 1981년부터 1983년까지 신문에 연재된 원고를 대조해, 검열로 훼손된 부분을 복원한 무삭제판으로 기획됐다. 이 경우 복간은 단순히 옛 판본을 다시 내는 일이 아니라 어떤 버전을 정본으로 삼을지 결정하는 편집 행위까지 포함한다.
이런 유형의 책은 권리 정리도 더 세밀해진다. 작가가 이미 사망했더라도 보호기간 안에 있다면 상속인이나 관리 주체와의 협의가 필요하고, 복원에 사용한 신문 연재본·기존 단행본·새 편집본 사이의 관계도 점검해야 한다. 복간의 이름으로 나오지만 실제 실무는 ‘새 판본 제작’에 더 가까운 셈이다.
도서정가제보다 먼저 풀어야 할 문제
절판서 복간을 두고 독자들은 흔히 가격 제도나 판매 채널을 먼저 떠올리지만, 실제로 책의 재출간 여부를 더 직접적으로 가르는 것은 권리와 계약이다. 도서정가제는 판매 단계의 할인 질서를 다루는 제도에 가깝고, 복간은 그보다 앞선 단계인 권리 회수와 재설계가 풀려야 시작된다. 독자 수요가 충분해 보여도 옛 계약이 정리되지 않으면 책은 돌아오지 못하고, 반대로 공공영역에 들어간 고전은 새 편집 기획만으로도 다시 시장에 진입할 수 있다.
절판된 책의 두 번째 생애는 결국 오래 읽히는 책을 어떻게 다시 유통 가능한 상태로 만들 것인가의 문제다. 그 출발점은 추억이나 화제성이 아니라 계약서의 문장과 권리의 귀속이다. 복간이 늘어날수록 출판사와 저작권자가 함께 확인해야 할 조건도 더 세밀해질 수밖에 없다.
자료: 법제처 국가법령정보센터, 저작권법 조문정보(2026-08-11 시행); 문화체육관광부, 정부 표준계약서로 공정한 출판 분야 생태계 만든다(2021-02-23);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출판 분야 표준계약서 해설(2021 고시 기준)(2025-10-16 게시); 한국저작권위원회, 저작권기초지식-저작재산권의 보호기간; 한국저작권위원회, [서울고등법원] 출판권 설정 계약이 저작권 양도계약으로 해석되어 저작권 침해 주장이 배척된 사건(2025-09-25); 푸른사상, 님의 침묵(출간 100주년 기념 복간본) 도서 소개(2026-08-31); 한빛비즈, 죽음의 부정 도서 소개(2019-08-16); 문학동네 유통 정보, 고우영 열국지 무삭제판 1 소개(2023-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