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의 미완성 소설, 우리가 읽는 순서는 누가 정했나
프란츠 카프카의 《소송》에서 독자가 가장 쉽게 놓치는 사실은 이야기의 순서가 작가가 최종 확정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현재 확인되는 자료를 종합하면, 카프카는 이 소설의 장들을 따로 분리해 남겼지만 번호를 매기지 않았고 완성본도 만들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가 읽는 장 배열은 먼저 유고 편집자 막스 브로트가 정했고, 이후 비평판 편집자들이 원고의 물질적 배열과 문장 상태를 다시 검토해 다른 읽기 방식을 제시했다.
이 문제는 단순한 문헌학적 호기심이 아니다. 《소송》은 체포 장면으로 시작해 처형 장면으로 끝나지만, 그 사이의 이동 경로와 리듬, 인물의 관계가 어떤 판본을 읽느냐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미완성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이야기를 읽는 동시에 누가 그 이야기를 책의 형태로 만들었는지까지 함께 읽는 일이다.
카프카가 남긴 것은 ‘책’이 아니라 분리된 묶음이었다
카프카박물관은 카프카의 작업 전반을 세 편의 미완성 장편과 다수의 단편 조각, 일기와 서신으로 설명한다. 독일어권 자료를 보면 《소송》은 1914년 8월 무렵부터 1915년 1월 사이 집필됐고, 원고의 장들은 서로 분리돼 있지만 번호가 없다. 독일의 카프카 자료 사이트도 카프카가 의도한 장 순서는 간접적으로만 추정할 수 있을 뿐 확정할 수 없다고 적고 있다.
독일문학아카이브 마르바흐 전시 자료는 카프카가 원고를 여러 묶음으로 정리해 남겼다고 설명한다. 시작과 끝에 해당하는 장은 비교적 분명하지만, 그 사이를 잇는 중간부는 작가의 최종 지시가 없다. 독자가 익숙하게 읽는 ‘하나의 완결된 장편’이라는 인상은 원고 상태에서 바로 주어지지 않는다.
브로트는 순서를 정했고, 1925년 초판은 일부를 본문에서 뺐다
카프카 사후 원고를 출간한 이는 친구이자 유고관리인이었던 막스 브로트다. 카프카박물관과 이스라엘국립도서관 설명에 따르면 브로트는 카프카의 유고를 보존해 출판으로 연결한 핵심 인물이다. 다만 그가 한 일은 단순 보관이 아니라 편집이었다. 독일어권 서지 자료에는 1925년 베를린에서 나온 초판이 브로트 편집본이며, 이 판본에는 파편적인 장들이 아직 포함되지 않았다고 적혀 있다.
여기서 구분해야 할 것은 세 가지다. 첫째 장 배열이다. 브로트는 번호 없는 장들을 읽고 자신이 타당하다고 본 순서를 부여했다. 둘째 미완성 부분의 처리다. 초판은 특히 덜 완결된 부분을 본문 바깥으로 밀어내거나 제외해 상대적으로 매끈한 소설처럼 보이게 했다. 셋째 문장 손질이다. 후대 연구와 번역본 소개 자료들은 브로트가 문장 부호와 표현을 다듬어 읽기 쉬운 텍스트를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후대 비평판은 ‘작품 완성’보다 ‘원고 상태’에 더 가까이 가려 했다
이후 판본들은 브로트의 결정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았다. 1990년 말콤 패슬리의 비평판과 이를 바탕으로 한 여러 현대 번역본은 원고를 다시 대조해 장의 경계와 배열을 복원하려 했다. 영어권 출판사 소개문은 이 판본들이 텍스트와 장 순서, 장의 구분을 작가가 남긴 상태에 최대한 가깝게 되돌렸다고 설명한다. 2024년 발표된 연구도 《소송》 편집사가 오랫동안 서로 다른 원고 조각을 ‘한 권의 책’으로 만드는 과정이었다고 짚는다.
그렇다고 비평판이 카프카의 확정 의도를 완전히 되찾았다는 뜻은 아니다. 확인 가능한 범위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브로트 판본보다 원고의 흔적을 더 많이 보존한다는 점이다. 반대로 어떤 순서가 절대적으로 정답이라고 단정할 근거는 여전히 부족하다.
독자가 읽는 것은 카프카의 소설이면서 동시에 편집의 결과다
그래서 《소송》을 읽을 때 필요한 질문은 번역이 좋으냐 나쁘냐만이 아니다. 내가 읽는 책의 저본이 브로트 계열인지, 비평판 계열인지, 미완성 장과 삭제 대목을 본문에 넣는지 따로 부록으로 두는지까지 살펴봐야 한다. 모든 번역본의 장 순서가 제각각인 것은 아니지만, 어떤 판본을 바탕으로 삼았는지에 따라 독서 경험은 분명 달라진다.
카프카의 미완성 소설은 작가의 천재성만으로 읽히지 않는다. 원고를 남긴 방식, 유고를 출간한 편집자의 판단, 뒤늦게 원고를 다시 읽은 비평판의 원칙이 함께 지금의 《소송》을 만들었다. 우리가 읽는 순서는 결국 카프카가 남긴 흔적 위에, 브로트와 후대 편집자들이 덧붙인 질서의 결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