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 다음은 ‘학원’…이민진이 한국계 서사를 교육과 계급으로 넓히는 법
-9월 29일 신작 ‘아메리칸 학원’ 한·미 동시 출간…한국 교육열에서 미국 이민자의 계층 이동까지 추적
이민진의 소설 세계가 식민지와 재일조선인의 역사에서 현대 한국의 교육 경쟁과 이민자의 계층 이동으로 이동한다. 세계적 베스트셀러 ‘파친코’ 이후 약 10년 만에 내놓는 장편 ‘아메리칸 학원(American Hagwon)’이 오는 9월 29일 북미와 한국에서 동시에 출간된다. 신작에서 이민진이 선택한 핵심 단어는 한국어 ‘학원’이다. 교육이 개인의 미래를 바꾸는 수단인 동시에 가족의 생존 전략이 되는 구조를 한국과 호주, 미국을 이동하는 한 가족의 삶을 통해 추적한다.
‘파친코’가 일제강점기와 일본 사회를 통과한 재일조선인 가족을 통해 민족과 차별, 생존의 문제를 다뤘다면 ‘아메리칸 학원’은 1990년대 이후 한국 중산층 가족의 이동을 따라간다. 시대적 배경도 식민지와 전쟁에서 외환위기, 세계화, 이민, 교육 경쟁으로 바뀐다. 한국계 서사의 중심축이 과거의 역사적 배제에서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기회와 불평등 문제로 확장되는 셈이다.
‘한국인은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가’에서 시작된 소설
이민진은 AP통신 인터뷰에서 신작의 출발점을 비교적 직접적으로 설명했다. 한국인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했고, 그 답 가운데 하나로 교육에 주목했다는 것이다. 작가는 한국인이 교육에 강하게 집착하는 이유 자체가 자신의 새로운 관심사가 됐다고 밝혔다.
제목에 사용된 ‘Hagwon’도 영어로 번역되지 않았다. 한국의 학원은 입시교육기관에 한정되지 않는다. 외국어와 음악, 취미와 직업교육까지 사교육이 거래되는 공간 전체를 포괄한다. 이민진은 이 한국어 단어를 그대로 작품의 제목에 배치하면서 학원을 한국 사회의 특수한 문화이면서 동시에 세계 어디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경쟁 구조의 상징으로 확장한다.
작품의 출발점은 1990년대 초 서울이다. 고씨 가족은 중산층의 생활 기반을 가지고 있지만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삶의 조건이 흔들린다. 이후 가족은 서울에서 호주 시드니로 이동하고 다시 미국 남부 캘리포니아에 정착한다. 해쳇북그룹은 작품을 성공의 기준과 사회의 규칙이 갑자기 달라졌을 때 한 가족이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다룬 장편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설정에서 교육은 단순한 소재가 아니다. 경제위기로 부모 세대가 축적한 경력과 학력이 새로운 사회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자녀 교육이 다시 계층 이동의 수단으로 등장한다. 부모가 현재의 지위를 잃더라도 자녀가 좋은 교육을 받으면 가족 전체가 다시 상승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작동한다.
‘파친코’가 혈통을 물었다면 신작은 자격을 묻는다
두 작품을 연결해서 보면 이민진의 관심사가 바뀌었다기보다 확장됐다는 해석에 가깝다. ‘파친코’에서 인물의 삶을 결정하는 중요한 조건은 출생과 혈통이었다. 조선인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은 일본 사회에서 개인이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구조적 조건으로 작용한다.
‘아메리칸 학원’에서는 혈통과 함께 학력과 직업, 자격, 교육이라는 새로운 변수가 등장한다. 한 사회에서 인정받던 학위와 경력이 국경을 넘는 순간 가치가 달라질 수 있다. 이민자는 이전 사회에서 확보했던 사회적 지위를 새 사회에서 다시 증명해야 한다.
현대문학이 공개한 작품 소개에서도 이런 문제는 뚜렷하게 나타난다. 한국에서 중산층이었던 가족이 이민 뒤에는 자신들이 축적한 학위와 경력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고, 자녀의 교육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 구조다. 한국에서 교육을 통해 계층을 유지하려 했던 가족이 미국에서도 다시 교육을 계층 이동의 수단으로 선택한다.
이 지점에서 제목의 ‘American’과 ‘Hagwon’이 결합한다. 학원은 한국에 있지만 교육을 통한 경쟁과 계층 이동의 욕망은 한국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미국 역시 대학 입시와 학군, 사교육, 학위와 전문직을 둘러싼 경쟁이 강하게 작동하는 사회다. 한국적 단어를 미국이라는 공간에 붙인 제목 자체가 교육 경쟁의 보편성을 드러내는 장치로 읽힌다.
1997년 외환위기, 가족을 이민자로 만드는 경제적 충격
신작의 시대적 배경에서 특히 중요한 사건은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다. ‘파친코’가 식민지배와 전쟁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충격을 한 가족의 이동과 연결했다면 ‘아메리칸 학원’에서는 금융위기가 가족의 삶을 바꾸는 분기점으로 등장한다.
경제위기는 소득 감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한 세대가 축적해온 직업적 지위와 자산, 미래에 대한 기대까지 동시에 흔든다. 고씨 가족에게도 외환위기는 이전에 당연하게 여겼던 중산층의 안정성을 무너뜨리는 계기가 된다. 가족이 국경을 넘는 이유가 정치적 박해나 전쟁만이 아니라 경제적 불안과 자녀의 미래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구조다.
이러한 이동은 20세기 후반 이후 한국계 미국인의 이민 경험과도 맞닿는다. 초기 한국계 이민문학에서 이민은 주로 인종차별, 언어 장벽, 정체성 갈등을 중심으로 다뤄졌다. 이후 세대의 작품에서는 전문직 진입, 대학 교육, 부모의 기대, 계층 재생산 등 보다 복합적인 문제가 중요한 주제로 부상했다.
이민진은 이 지점을 가족서사의 장기적인 시간축으로 끌어들인다. 부모 세대가 경험한 경제위기와 이민의 비용이 자녀 세대의 교육 선택에 연결되고, 자녀의 교육 성취가 다시 가족 전체의 사회적 지위와 연결된다. 이 과정에서 교육은 개인적인 자기계발을 넘어 세대 간 자원이 이동하는 통로가 된다.
한국계 미국문학도 ‘정체성’에서 ‘계급’으로 이동한다
‘아메리칸 학원’이 주목되는 또 다른 이유는 한국계 미국문학이 다루는 주제의 변화 때문이다. 초기 이민문학의 핵심 질문 가운데 하나가 “나는 어느 나라 사람인가”였다면 최근에는 “누가 어떤 기회를 얻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인종과 정체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종 문제 위에 교육과 소득, 주거지역, 직업, 부모의 자산이라는 계급적 변수가 겹쳐진다. 같은 한국계 미국인이라도 이민 시기와 부모의 직업, 교육 수준, 경제적 기반에 따라 경험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이민진의 첫 장편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Free Food for Millionaires)’ 역시 이런 문제를 다뤘다. 명문대를 졸업한 한국계 미국인 여성이 뉴욕의 금융과 전문직 사회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계급과 가족, 성공의 기준을 묻는다. 2007년 발표된 이 작품과 ‘파친코’, ‘아메리칸 학원’은 작가가 구상한 한국과 한국 디아스포라를 다루는 네 작품 가운데 앞선 세 작품에 해당한다.
첫 작품에서 현대 미국 사회의 계층과 성공을 다루고, 두 번째 작품에서 재일조선인의 역사를 거쳐 세 번째 작품에서 다시 현대의 교육 경쟁으로 돌아온 셈이다. 작품의 시대와 지역은 달라졌지만 개인의 선택이 사회구조와 충돌한다는 문제의식은 이어진다.
특히 교육은 이 세 영역을 연결하기 좋은 주제다. 교육은 개인의 노력과 능력을 평가하는 제도로 설명되지만 실제로는 가족의 소득과 거주지역, 정보와 인적 네트워크의 영향을 받는다. 노력과 계급, 능력과 상속이 동시에 작동하는 공간이다.
교육은 사다리인가, 가족이 감당해야 하는 비용인가
‘아메리칸 학원’이 던지는 핵심 질문은 교육의 효과 자체보다 교육을 둘러싼 믿음에 가깝다. 좋은 교육이 더 나은 삶을 보장한다는 믿음은 한국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강력하다. 그러나 교육비와 대학등록금, 주거비가 상승하고 계층 이동 가능성이 낮아질수록 이 믿음은 점차 긴장에 직면한다.
한국에서 ‘학원’은 이러한 모순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공간 가운데 하나다. 교육이 공정한 경쟁의 수단으로 인식될수록 가정은 더 많은 교육자원을 투입한다. 사교육 투자가 확대되면 부모의 경제력이 다시 교육 기회의 차이로 이어질 수 있다.
이민자의 상황에서는 문제가 한 단계 더 복잡해진다. 부모 세대는 이주 과정에서 자신의 직업적 지위를 잃을 수 있지만 자녀에게는 새로운 사회의 교육 시스템을 통해 상승할 기회가 있다고 믿는다. 자녀 교육에 대한 투자가 가족 전체의 장기 전략이 되는 이유다.
이민진은 이 문제를 선악의 구도로 단순화하지 않는다. 교육 경쟁에는 욕망이 있지만 동시에 생존의 논리도 있다. 부모가 자녀에게 더 나은 삶을 제공하려는 선택과 사회가 그 선택을 과도한 경쟁으로 몰아가는 구조를 동시에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학원’이라는 한국어가 세계 독자에게 통할 수 있을까
출판 시장의 측면에서도 제목 선택은 흥미롭다. ‘Pachinko’에 이어 ‘Hagwon’이라는 동아시아 문화의 고유명사가 영어권 대형 출판시장의 소설 제목으로 등장했다. 특정 문화권의 단어를 영어로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는 전략이다.
‘파친코’ 역시 일본에서 유래한 게임 명칭이지만 작품을 통해 재일조선인의 생존과 사회적 위치를 상징하는 단어로 확장됐다. ‘학원’ 역시 작품이 세계적으로 읽힐 경우 사교육기관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넘어 교육 경쟁과 부모의 투자, 계층 이동을 나타내는 문화적 개념으로 인식될 가능성이 있다.
해쳇북그룹은 ‘아메리칸 학원’을 오는 9월 29일 Cardinal을 통해 출간한다. 종이책과 전자책, 오디오북이 함께 나온다. 오디오북은 배우 예린 하(Yerin Ha)가 영어와 한국어를 사용해 낭독한다. 한국에서는 현대문학이 출판권을 확보해 같은 날 한국어판을 내놓을 예정이다.
‘파친코’가 애플TV+ 시리즈로 제작되고 세계 각국에서 번역되면서 한국계 가족사가 글로벌 문화콘텐츠로 확장된 전례도 있다. 신작 역시 출간 이후 작품의 평가뿐 아니라 ‘학원’이라는 한국적 제도가 해외 독자에게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지는지가 관전 지점이 될 수 있다.
역사 속 생존에서 현대사회의 경쟁으로
이민진은 AP 인터뷰에서 자신을 ‘우연한 역사가(accidental historian)’라고 표현했다. 거대한 이야기를 통해 과거를 발굴하고 현재를 이해하며 인종과 성별, 계급을 탐구하는 작가라는 설명이다. 그의 작품을 연결해서 보면 이 표현의 의미가 보다 분명해진다.
‘파친코’에서 역사는 국가와 식민주의가 개인에게 부과하는 조건이었다. ‘아메리칸 학원’에서는 금융위기와 세계화, 교육 경쟁이 가족의 선택을 규정한다.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힘의 형태는 달라졌지만 한 가족의 삶을 통해 거대한 사회구조를 바라보는 방식은 유지된다.
한국계 미국문학 역시 같은 방향으로 넓어지고 있다. 이민자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교육과 노동, 주거, 자산, 계층 재생산 같은 현대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한국계 가족의 경험을 통해 해석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메리칸 학원’의 핵심은 한국의 교육열을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한국에서 시작된 교육 경쟁이 국경을 넘어 미국의 계급 이동 문제와 만나는 지점을 보여주는 데 있다. ‘파친코’가 “역사가 개인의 삶을 어떻게 바꾸는가”를 물었다면, 신작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교육은 정말 다음 세대의 삶을 바꿀 수 있는가”를 묻는다.
9월 29일 출간될 이 작품이 어떤 답을 제시할지는 아직 독자의 영역에 남아 있다. 다만 작품의 설정만으로도 이민진의 한국계 서사가 역사와 민족의 기억에서 교육과 계급, 세계화 이후의 가족 전략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파친코’ 이후 그의 문학이 향하는 곳은 또 하나의 이민사가 아니라 오늘날 가족이 다음 세대의 미래를 확보하기 위해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감수하는지를 묻는 현대사회에 가깝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