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헤드라인

독사는 죽음인가 구원인가…셰익스피어로 읽는 윌리엄 엠프슨의 ‘애매성’

▲클레오파트라와 독사를 모티프로 제작한 이미지. 셰익스피어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의 마지막 장면에서 독사는 죽음을 가져오는 존재인 동시에 삶의 매듭을 풀어주는 해방의 상징으로 읽히며, 이러한 중층적 의미는 윌리엄 엠프슨이 말한 문학적 ‘애매성’을 보여준다. 이미지=파르트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의 독사에서 『애매성의 일곱 가지 유형』까지…좋은 문장은 왜 하나의 뜻으로 끝나지 않는가


독사를 향해 말을 거는 클레오파트라


셰익스피어의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마지막 장면에서 클레오파트라는 독사를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오며 죽음을 준비하지만, 셰익스피어는 이 순간을 단순히 한 인간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장면으로 처리하지 않는다. 로마의 개선식에 포로로 끌려가 구경거리가 되는 굴욕을 거부한 클레오파트라는 죽음을 앞에 두고도 공포에 사로잡히기보다, 자신에게 죽음을 가져올 작은 독사를 마치 오래 기다려온 존재처럼 불러들인다.

그녀가 독사를 향해 건네는 말은 “Come, thou mortal wretch”로 시작하며, 이어 날카로운 이빨로 복잡하게 얽힌 삶의 매듭을 한꺼번에 풀어달라고 요구한다.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5막 2장에서 확인되는 이 대사에서 죽음은 삶을 절단하는 폭력이라기보다 오랫동안 얽혀 있던 매듭을 풀어주는 행위로 표현된다(폴저 셰익스피어 도서관).

장면은 여기서 더 복잡해진다. 독사가 클레오파트라의 가슴을 물기 시작하자 그녀는 자신에게 죽음을 가져오는 생물을 살인자라고 부르지 않고, 오히려 가슴에서 젖을 빠는 자신의 아기처럼 묘사한다. 생명의 시작을 상징하는 아기와 생명을 끝내는 독사가 같은 이미지 속에서 포개지고, 죽음과 탄생, 파괴와 해방, 고통과 욕망이 한 순간에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이 독사는 죽음인가, 아니면 구원인가. 클레오파트라에게 죽음은 패배인가, 아니면 로마가 결정하려 했던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스스로 선택하는 해방인가. 이런 질문에 하나의 답만을 고르려고 할수록 셰익스피어의 문장은 오히려 더 많은 의미를 드러낸다.

20세기 영국 비평가 윌리엄 엠프슨은 바로 이런 순간에 주목했다. 하나의 문장이 두 가지 이상의 의미를 품고 서로 다른 방향으로 독자를 끌어당기는 현상을 그는 문학의 결함이 아니라 문학이 인간의 복잡한 경험을 담아내는 중요한 방식으로 바라봤고, 그 개념을 ‘ambiguity’, 즉 애매성이라고 불렀다.


애매성은 ‘뜻을 모르겠다’는 말이 아니다


일상에서 ‘애매하다’는 표현은 대체로 부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계약서의 문장이 애매하면 분쟁이 발생할 수 있고, 정책 문구가 애매하면 적용 기준이 흔들리며, 누군가의 입장이 애매하다고 하면 의사를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문학에서 애매성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다. 하나의 단어나 이미지가 여러 의미를 동시에 만들어내고,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순간 다른 의미가 사라져버린다면 그 복수의 가능성 자체가 작품의 미학적 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엠프슨은 1930년 출간한 『Seven Types of Ambiguity』에서 애매성을 상당히 넓은 의미로 사용했다. 하나의 언어 표현이 둘 이상의 해석을 가능하게 하거나 서로 다른 감정과 판단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경우까지 그의 분석 대상에 포함됐으며, 이후 이러한 접근은 시와 문학작품을 문장과 단어 단위로 세밀하게 읽는 비평 방법의 발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Poetry Foundation).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불명확함’과 ‘다의성’을 구분하는 일이다. 작가가 생각을 충분히 정리하지 못해 무엇을 말하려는지조차 알 수 없게 만든 문장과, 하나의 표현이 의도적으로 또는 언어 자체의 구조 때문에 여러 의미를 동시에 발생시키는 문장은 같은 것이 아니다.

엠프슨이 관심을 가진 것은 후자였다. 좋은 문학에서 애매성은 독자가 뜻을 찾지 못하게 만드는 장애물이 아니라, 하나의 뜻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감정과 상황을 언어 안에 그대로 남겨두는 장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22세 청년이 바꾼 문학 읽기의 방법


윌리엄 엠프슨은 1906년 영국에서 태어났으며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처음에는 수학을 공부하다가 영문학으로 관심을 넓혔다. 『애매성의 일곱 가지 유형』은 그가 20대 초반에 집필한 책으로, 1930년 출간된 뒤 영미권 문학비평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저작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다.

당시 문학비평에서는 작품의 역사적 배경이나 작가의 생애, 사상적 맥락을 중심으로 작품을 해석하는 방식이 여전히 강했지만, 엠프슨은 시 한 행과 단어 하나가 어떻게 여러 의미를 만들어내는지를 끈질기게 추적했다. 그의 관심은 작품이 무엇을 말하는가보다, 그 의미가 언어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지고 겹쳐지는가에 가까웠다.

이런 태도는 이후 신비평과 ‘close reading’, 즉 세밀하게 읽기의 발전과 깊은 관련을 맺는다. 다만 엠프슨을 신비평의 한 구성원으로 단순하게 묶는 것은 정확하지 않으며, 최근 연구에서도 그는 텍스트 내부의 구조뿐 아니라 언어가 놓인 사회적·역사적 맥락과 작가·독자의 관계까지 고려했던 독자적인 비평가로 평가된다(Oxford Academic).

엠프슨의 질문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한 문장이 왜 하나의 의미만 전달하지 않고 여러 뜻을 동시에 발생시키는지, 그리고 그 의미들이 서로 충돌하거나 결합할 때 문학적 효과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살펴보자는 것이었다.

그에게 문학은 정답을 전달하는 언어가 아니라, 서로 다른 의미들이 한 문장 안에서 긴장하는 과정 자체를 보여주는 언어였다.


일곱 가지 유형은 문학의 ‘분류표’가 아니다


『애매성의 일곱 가지 유형』이라는 제목 때문에 이 책을 일곱 개의 애매성을 정확히 구분해놓은 교과서처럼 받아들이기 쉽지만, 실제로 엠프슨이 보여주려 한 것은 엄격한 분류보다 의미가 단순한 중첩에서 복잡한 충돌로 발전하는 과정에 가깝다.

초기의 유형에서는 하나의 표현이 여러 효과를 동시에 만들어내거나 서로 다른 의미가 하나의 결과로 결합하는 방식이 나타난다. 뒤로 갈수록 의미 사이의 관계는 복잡해지고, 서로 양립하기 어려운 생각이 한 문장 속에 동시에 남거나 작가 자신도 완전히 조정하지 못한 내적 긴장이 언어로 드러나는 단계까지 확장된다.

마지막 유형에 가까워질수록 애매성은 단순한 말장난이나 중의적 표현의 수준을 벗어난다. 사랑과 증오, 욕망과 두려움, 선택과 후회처럼 서로 반대되는 감정이 한 인물 안에서 동시에 존재하고, 문장은 그 충돌을 제거하지 않은 채 독자에게 전달한다.

따라서 엠프슨의 일곱 유형을 외우는 것이 이 책을 읽는 목적은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문장을 너무 빨리 이해했다고 판단하지 않고, 하나의 단어가 여러 방향으로 움직일 가능성을 열어두며, 서로 충돌하는 의미 가운데 하나를 편리하게 제거하지 않는 읽기의 태도다.

이런 점에서 『애매성의 일곱 가지 유형』은 문학을 분류하는 책이라기보다 문장을 천천히 읽는 법을 가르치는 책에 가깝다.


죽음을 가져오는 독사가 왜 ‘아기’가 되는가


클레오파트라의 마지막 장면을 다시 보면 엠프슨이 말한 애매성이 실제 문학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다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독사의 가장 직접적인 의미는 물론 죽음이며, 클레오파트라는 그것이 자신의 생명을 끝낼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스스로 가슴에 가져간다.

그러나 셰익스피어는 그 죽음을 단순한 종말로 남겨두지 않는다. 클레오파트라가 자신의 삶을 복잡하게 얽힌 매듭으로 표현하는 순간 죽음은 삶을 끊는 폭력에서 매듭을 풀어주는 해방의 행위로 이동하고, 독사의 이빨 역시 살해의 도구이면서 동시에 자신을 억압에서 풀어주는 수단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갖게 된다.

여기에 ‘아기’라는 이미지가 겹치면서 의미는 더욱 복잡해진다. 가슴에 매달린 아기는 생명을 이어가는 존재지만, 이 장면에서 가슴을 물고 있는 것은 독을 가진 뱀이며, 젖을 빠는 행위와 생명을 빼앗는 행위가 하나의 모습으로 결합한다.

조금 앞에서는 죽음이 연인의 꼬집음처럼 표현되기도 한다. 고통스럽지만 원하는 것, 두렵지만 가까이하고 싶은 것이라는 모순된 감정이 동시에 들어오면서 죽음은 공포와 욕망의 경계에서도 흔들리기 시작한다.

따라서 이 장면을 “클레오파트라가 자살했다”는 사건의 요약만으로 설명하면 줄거리는 전달되지만 셰익스피어가 언어를 통해 만들어낸 의미의 상당 부분은 사라진다. 죽음이면서 해방이고, 독사이면서 아기이며, 고통이면서 욕망이라는 상태가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에 이 장면은 단순한 사건을 넘어 문학이 된다.


셰익스피어는 왜 엠프슨에게 중요한 작가였나


엠프슨이 셰익스피어를 중요하게 다룬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셰익스피어의 인물들은 자신의 감정을 하나의 논리로 정돈한 뒤 말하지 않고, 서로 모순되는 생각과 욕망이 충돌하는 순간을 그대로 언어로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사람은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원망할 수 있고, 성공을 원하면서 그 성공이 가져올 변화를 두려워할 수도 있으며, 어떤 관계에서 떠나고 싶어 하면서도 상대가 자신을 붙잡아주기를 바랄 수 있다. 인간의 실제 감정은 이런 모순을 끊임없이 포함하지만 설명의 언어는 흔히 그 가운데 하나만을 선택해 단순화하려 한다.

셰익스피어의 문장은 반대로 움직인다. 서로 반대되는 감정을 한 인물 안에 그대로 남겨두고, 그 모순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사가 흘러가도록 만들면서 인간의 내면이 본래 얼마나 불안정하고 다층적인지를 보여준다.

엠프슨에게 애매성은 그래서 단순한 수사기법이 아니었다. 인간의 경험 자체가 하나의 의미로 완전히 정리되지 않기 때문에 문학 역시 그 복잡성을 보존해야 하며, 좋은 작품은 모순을 지우기보다 오히려 언어 속에 남겨둔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문학의 애매성은 결국 언어의 문제가면서 동시에 인간을 바라보는 방식의 문제였다.


애매성은 ‘아무렇게나 해석해도 된다’는 뜻인가


그러나 문학에 여러 의미가 존재한다는 말을 잘못 받아들이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하나의 작품에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면 독자가 원하는 대로 어떤 의미든 만들어내도 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이다.

엠프슨의 애매성은 그런 무제한적인 해석의 자유와는 거리가 멀다. 여러 의미가 가능하려면 그 가능성은 실제 작품의 단어와 문법, 문맥과 인물의 상황에서 나와야 하며, 텍스트 안에서 확인할 수 있는 근거가 해석을 지지해야 한다.

클레오파트라의 독사를 생명과 연결해 읽을 수 있는 이유는 독자가 마음대로 상상했기 때문이 아니라 셰익스피어가 바로 그 독사를 가슴의 ‘아기’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죽음을 해방으로 읽을 수 있는 것 역시 그녀가 자신의 죽음을 삶의 매듭을 푸는 행위로 말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해석이다.

결국 애매성과 자의적 해석을 가르는 기준은 근거다. 텍스트 안에 여러 의미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과 텍스트에 없는 의미를 독자가 마음대로 부여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따라서 엠프슨의 애매성은 “정답이 없다”는 선언이라기보다 “정답이 하나뿐이라고 너무 빨리 결정하지 말라”는 제안에 가깝다.


빠르게 요약하는 시대, 다시 ‘천천히 읽기’


『애매성의 일곱 가지 유형』이 출간된 것은 1930년이지만, 이 책이 거의 한 세기가 지난 뒤에도 문학비평에서 반복적으로 논의되는 이유는 그 문제의식이 특정 시대의 비평이론에만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Oxford Academic에 실린 최근 연구에서도 이 책은 오늘날 ‘close reading’을 다시 생각하는 데 중요한 텍스트로 평가되고 있다.

이 문제는 오히려 빠른 요약과 즉각적인 답변에 익숙해진 오늘날 더 흥미롭게 다가온다. 우리는 긴 소설의 내용을 몇 문장으로 압축하고, 시의 의미를 한 줄의 주제로 정리하며, 작품을 읽은 뒤 “그래서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빠르게 답하려는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런 방식은 정보를 얻는 데 효율적이지만 모든 문학작품이 하나의 메시지로 환원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문제가 시작된다. 『햄릿』의 주제나 『이방인』의 의미를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는 있지만, 그 한 문장이 작품 전체를 대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문학은 때때로 어떤 답을 전달하기 위해 존재하기보다, 서로 충돌하는 감정과 의미를 동시에 보존하기 위해 존재한다. 엠프슨의 애매성은 바로 그 복잡성을 너무 빨리 정리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읽기의 방식이다.


좋은 문장은 왜 하나의 뜻으로 끝나지 않는가


클레오파트라의 가슴에 놓인 독사는 하나지만 그 독사가 만들어내는 의미는 하나가 아니다. 그것은 생명을 끊는 죽음의 생물이면서 삶의 매듭을 풀어주는 존재이고, 클레오파트라의 가슴에 매달린 독사이면서 동시에 젖을 빠는 아기이며, 고통을 주는 존재이면서 그 고통을 스스로 원하는 욕망의 대상이기도 하다.

셰익스피어가 이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 정답으로 만들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이 장면은 400년이 지난 지금도 서로 다른 해석을 만들어낸다. 독자는 죽음과 해방 가운데 하나를 지우지 않고, 패배와 선택 가운데 하나만을 남기지 않으면서 그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간의 복잡한 감정을 읽게 된다.

엠프슨이 『애매성의 일곱 가지 유형』을 통해 발견한 것도 결국 이 지점이었다. 문학의 언어는 정보를 전달하는 문장처럼 하나의 의미를 빠르고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만을 목표로 하지 않으며, 때로는 여러 의미가 동시에 존재하도록 만드는 능력 때문에 더 깊은 경험을 전달할 수 있다.

애매성은 문학의 불완전함이 아니라 인간 경험의 복잡성을 언어 속에 남겨놓는 하나의 방법이다. 때문에 엠프슨이 독자에게 남긴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일곱 개의 유형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한 문장을 너무 빨리 이해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독사가 죽음인지 구원인지 묻되 어느 한쪽을 서둘러 지우지 않는 것, 하나의 문장이 서로 다른 두 가지 말을 하고 있다면 오류라고 판단하기 전에 왜 그 두 의미가 동시에 필요했는지를 생각하는 것에서 문학적 독해는 시작된다.

그 순간 독서는 정답을 찾는 행위에서 해석하는 행위로 넘어간다.

좋은 문장이 하나의 뜻으로 쉽게 끝나지 않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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