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2800년 전 오디세우스에게 다시 열광하는가…노스럽 프라이와 ‘원형비평’

▲원형비평은 문학과 신화에서 반복되는 인물·이미지·상황·서사 구조를 통해 작품을 읽는 비평 방식이다. 노스럽 프라이는 1957년 『비평의 해부』에서 문학을 희극·로맨스·비극·아이러니 등의 반복되는 구조와 신화적 패턴으로 분석했다. 2026년 크리스토퍼 놀런의 『The Odyssey』가 세계적으로 흥행한 현상을 출발점으로, 약 2800년 전 오디세우스의 귀환 서사가 오늘날에도 반복되는 이유와 원형비평의 의미와 한계를 살펴본다. 사진=2026년 크리스토퍼 놀런의 『The Odyssey』
-크리스토퍼 놀런의 『오디세이』 흥행에서 영웅의 귀환과 죽음·재생의 신화까지…시대가 달라도 비슷한 이야기가 되풀이되는 이유
최신 IMAX 기술이 선택한 가장 오래된 이야기
2026년 여름 세계 극장가의 중심에는 새로운 영웅이 아니라 약 2800년 전부터 전해져 온 한 남자의 귀환 이야기가 있었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이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영화화한 『The Odyssey』는 7월 17일 개봉한 뒤 두 달 가까이 흥행을 이어가며 9월 초 세계 누적 흥행수입 16억3000만달러를 넘어섰고, 놀런 감독 작품 가운데 가장 높은 흥행실적을 기록했다.
기술적으로는 철저하게 21세기의 영화다. IMAX에 따르면 『The Odyssey』는 장편 극영화로는 처음으로 전체 분량을 IMAX 70㎜ 필름 카메라로 촬영했으며, 개봉 첫 주말 IMAX 상영만으로 세계에서 5200만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세계 영화산업이 구현할 수 있는 최첨단 영상기술이 선택한 서사가 인공지능도, 우주전쟁도 아닌 고대 그리스의 귀향담이라는 사실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대비를 만든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서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을 마친 뒤 자신의 왕국 이타카와 아내 페넬로페에게 돌아가기 위해 긴 항해를 시작한다. 그러나 바다는 곧 집으로 돌아가는 통로가 아니라 인간의 능력과 욕망을 시험하는 거대한 공간으로 바뀌고,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와 마녀 키르케, 세이렌의 유혹과 칼립소의 섬을 거치면서 귀향에는 10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해진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이상한 친숙함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오디세우스처럼 바다를 항해하지 않았고 키클롭스를 만난 적도 없지만, 집을 떠난 인물이 낯선 세계에서 시련을 겪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확인한 뒤 달라진 모습으로 돌아온다는 이야기에는 이미 여러 번 접한 것 같은 익숙함이 있다.
왜 시대와 문화가 달라져도 이야기는 비슷한 모습으로 돌아오는가.
20세기 캐나다 문학비평가 노스럽 프라이가 ‘원형비평(Archetypal Criticism)’을 통해 붙잡으려 했던 질문도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원형이란 무엇인가…처음 보는데도 익숙한 이야기
원형을 뜻하는 ‘archetype’은 문학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인물과 이미지, 상황과 이야기 구조의 기본적인 형태를 가리킨다. 영웅과 어머니, 현자와 배신자처럼 반복되는 인물형이 있을 수 있고, 바다와 숲, 사막과 정원처럼 지속적으로 되돌아오는 공간 이미지도 있으며, 출생과 성장, 추방과 시련, 죽음과 재생, 귀환처럼 수없이 되풀이되는 서사 구조도 원형의 대상으로 볼 수 있다.
원형이라는 개념을 현대적으로 확장한 인물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은 스위스 정신의학자 카를 구스타프 융이다. 융에게 원형은 인간의 집단무의식 속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근원적인 이미지와 관련돼 있었으며, 토론토대학교의 문학용어 자료도 원형을 융의 집단무의식에 나타나는 지배적인 주제와 연결해 설명한다.
그러나 문학의 원형비평을 융 심리학과 그대로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노스럽 프라이가 관심을 둔 대상은 인간 정신의 깊은 곳에 어떤 선험적 형상이 존재하는지를 증명하는 일이 아니라, 실제 문학작품들을 나란히 놓았을 때 어떤 이미지와 서사 구조가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변형되는지를 밝히는 일이었다.
이 차이를 간단하게 말하면 융은 인간 정신에서 반복되는 원형을 보려 했고, 프라이는 문학이라는 거대한 체계 안에서 반복되는 원형을 읽으려 했다고 정리할 수 있다. 토론토대학교 자료 역시 프라이가 1957년 『Anatomy of Criticism』에서 서구문학 안에 의식적으로 축적돼 온 문학적 원형들을 분류하고 체계화하려 했다고 설명한다.
노스럽 프라이, 작품 한 편이 아니라 ‘문학 전체’를 보다
노스럽 프라이가 1957년 발표한 『Anatomy of Criticism: Four Essays』는 20세기 영미 문학비평의 대표적인 이론서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토론토대학교 자료에 따르면 이 책은 초판 이후 25차례 이상 재판됐으며, 프라이는 고대 신화와 민담에서 추리소설과 서부극, 공상과학과 현대소설에 이르기까지 서로 멀어 보이는 이야기들을 하나의 문학적 체계 속에서 바라보려 했다.
그가 보기에 문학작품은 완전히 고립된 창조물이 아니었다. 새로운 작품이 등장할 때마다 이전의 신화와 이야기, 상징과 인물 유형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시대의 언어와 장르를 입고 다시 나타나며, 작가는 이전 이야기의 구조를 의식적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오랫동안 축적된 서사적 관습을 이어받기도 한다.
따라서 원형비평의 질문은 “이 작품의 주제가 무엇인가”에서 멈추지 않는다. 이 인물은 우리가 이전에 어디에서 보았는가, 이 여행은 어떤 오래된 여행을 반복하고 있는가, 물과 밤과 숲이라는 이미지가 다른 작품에서는 어떤 의미로 사용됐는가를 따라가면서 개별 작품을 거대한 문학적 기억 속에 위치시킨다.
바로 여기서 오디세우스는 매우 강력한 사례가 된다.
오디세우스의 핵심은 모험보다 ‘돌아온다’는 데 있다
『오디세이아』에는 괴물과 신, 폭풍과 마법이 끊임없이 등장하지만 이야기 전체를 움직이는 힘은 의외로 단순하다. 오디세우스는 집으로 돌아가려 한다.
그러나 원형비평에서 ‘귀환’은 단순히 출발했던 장소로 다시 이동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익숙한 세계를 떠나 경계를 넘고, 자신을 위협하는 낯선 공간에 들어가 시련과 상실을 경험한 뒤 처음과는 다른 존재가 되어 원래 세계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오디세우스 역시 트로이를 떠났던 사람과 이타카에 도착한 사람이 완전히 같다고 보기 어렵다. 그는 동료들을 잃고 죽음의 세계에 가까이 다가가며, 신들의 도움과 방해를 동시에 경험하고, 자신의 이름을 숨기고 다른 사람으로 가장해야 하는 순간까지 지나간 뒤 고향에 도착한다.
중요한 것은 이 구조를 곧바로 조지프 캠벨이 대중화한 ‘영웅의 여정’과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다. 캠벨의 비교신화학과 프라이의 원형비평은 신화가 반복되는 구조에 관심을 공유하지만 이론적 목적과 체계가 다르며, 프라이는 특정 영웅의 모험 단계를 하나의 공식으로 만드는 것보다 문학 전체에서 반복되는 장르와 신화적 운동의 관계를 체계화하는 데 더 큰 관심을 두었다.
그러므로 오디세우스가 원형적 영웅이라는 말은 모든 현대 영웅이 오디세우스를 그대로 복제했다는 뜻이 아니다. 집을 떠남과 시련, 하강과 상실, 정체성의 변화와 귀환이라는 오래된 서사적 움직임이 시대마다 새로운 인물과 공간을 얻으면서 반복되고 있다는 의미에 가깝다.
봄에는 다시 태어나고, 가을에는 영웅이 추락한다
프라이의 원형비평이 흥미로운 이유는 인물만이 아니라 이야기의 움직임 자체에도 반복되는 질서가 있다고 보았다는 데 있다. 그는 문학의 대표적인 서사 형식을 희극, 로맨스, 비극, 아이러니·풍자의 흐름으로 바라보고 이를 자연의 계절적 순환과 연결했다.
봄은 겨울이 끝난 뒤 질서가 회복되고 새로운 공동체가 만들어지는 희극적 세계와 연결된다. 여름은 영웅이 힘을 얻고 이상적인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로맨스의 계절이며, 가을은 높은 곳에 있던 인물이 추락하고 죽음이나 상실로 향하는 비극과 연결된다. 겨울은 세계가 얼어붙고 인간이 소외되며 이상적인 질서가 무너진 아이러니와 풍자의 영역에 가까워진다.
토론토대학교가 프라이의 기본 체계를 소개하면서 로맨스를 영웅의 탐색, 희극을 장애를 넘어 새로운 결합으로 나아가는 이야기, 비극을 높은 위치에서 추락하는 이야기, 아이러니를 얼어붙은 겨울의 세계와 연결해 설명하는 것도 이러한 구조 때문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문학은 직선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계절처럼 순환한다. 탄생 뒤에 성장이 오고, 성취 뒤에 쇠퇴가 있으며, 죽음 뒤에는 다시 새로운 질서가 시작될 가능성이 나타난다.
그래서 물과 바다 역시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바다는 인간이 통제하던 육지의 질서가 사라지는 경계이고, 그 경계를 건너는 동안 오디세우스는 왕이라는 안정된 신분에서 벗어나 난파자와 포로, 이름 없는 이방인이 된다. 이타카로 돌아오는 것은 지리적 귀환인 동시에 무너진 질서가 다시 형성되는 움직임으로 읽을 수 있다.
우리는 정말 새로운 이야기를 보고 있는가
원형비평이 현대 대중문화에서도 쉽게 이해되는 이유는 영화와 드라마, 게임과 웹툰에서도 출발과 추방, 시련과 귀환, 죽음과 재생 같은 구조가 계속 발견되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무대는 우주와 미래도시로 이동하고 영웅의 무기는 검에서 첨단 장비로 바뀌지만, 낯선 세계로 들어간 인물이 자신의 한계를 경험한 뒤 변화한다는 구조 자체는 낯설지 않다.
그렇다고 “세상에는 몇 가지 이야기밖에 없다”는 식으로 결론 내리는 것은 원형비평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이다. 같은 귀환 서사를 사용하더라도 어떤 사회에서 누가 집을 떠나는지, 왜 떠나야 했는지, 누가 그의 귀환을 기다리는지에 따라 작품의 정치적·사회적 의미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오디세우스의 귀환 역시 그의 모험만 바라보면 이야기의 절반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타카에서는 페넬로페가 오랜 시간 구혼자들의 압박을 견디며 가정을 지키고 있고, 아들 텔레마코스는 부재한 아버지의 자리를 의식하며 성장한다. 귀향이라는 하나의 원형 안에서도 남편과 아내, 아버지와 아들, 통치자와 공동체의 문제가 동시에 움직이고 있다.
원형은 반복되지만 반복은 복제가 아니다.
바로 이 구분이 중요하다.
원형비평의 힘과 동시에 나타나는 위험
원형비평은 서로 전혀 관계없어 보이던 작품들을 연결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강력하지만, 그 힘이 지나치게 확대되면 약점도 나타난다. 모든 이야기를 영웅과 어머니, 죽음과 재생, 여행과 귀환 같은 몇 개의 보편적인 구조로 환원하면 작품이 만들어진 시대와 사회의 차이를 지워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서구 고전문학에서 반복된 구조를 인류 전체의 보편적 원형으로 확대할 경우 다른 문화권이 가진 독자적인 신화와 역사적 경험을 서구의 분류체계 안에 억지로 끼워 맞추는 문제도 생길 수 있다. 또한 같은 ‘영웅의 귀환’이라도 계급과 젠더, 식민주의와 전쟁이라는 역사적 조건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을 원형만으로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
프라이의 거대한 문학 체계가 1980년대 이후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부상 속에서 비판받은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토론토대학교는 당시 프라이의 정교한 분류가 문학을 지나치게 많은 ‘칸막이’에 넣는다는 비판을 받았고, 고전 중심의 체계 역시 새로운 비평 흐름의 도전을 받았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원형비평의 가치는 모든 작품의 비밀을 하나의 공식으로 풀어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시대의 작품을 연결해 볼 수 있는 하나의 렌즈를 제공하되, 그 렌즈가 보여주지 못하는 역사와 문화의 차이도 함께 인정할 때 비로소 유효한 독법이 된다.
2800년을 건너온 이야기가 여전히 작동하는 이유
2026년 놀런의 『The Odyssey』가 보여주는 흥미로운 지점은 고대 서사와 현대 기술의 극단적인 결합에 있다. 영화는 새로운 IMAX 필름 기술을 이용해 지금의 관객이 경험할 수 있는 거대한 시청각적 공간을 만들었지만, 그 공간의 중심에는 전쟁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한 인간의 매우 오래된 욕망이 놓여 있다.
그리고 관객은 그 이야기에 대규모로 반응했다. 9월 초까지 세계 흥행수입이 16억달러를 넘어섰다는 사실은 『오디세이아』가 단지 서양 고전문학 교과서 속 작품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매체와 시대의 언어로 다시 번역될 수 있는 강력한 서사적 자원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원형비평의 관점에서 더 흥미로운 것은 흥행 규모 자체가 아니다.
왜 우리는 집을 떠난 사람이 돌아오는 이야기를 계속 보고 싶어 하는가. 왜 영웅은 안전한 장소에 머물지 않고 경계를 넘어야 하며, 왜 그 과정에서 무언가를 잃은 뒤에야 자신이 떠나온 세계로 돌아올 수 있는가. 왜 죽음과 하강 뒤에는 재생이 따라오고, 겨울이 지나면 다시 봄이 오는 이야기가 수천 년 동안 반복되는가.
노스럽 프라이는 그 반복을 문학의 빈곤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문학은 이전 이야기를 기억하면서 끊임없이 변주되는 거대한 구조이며, 개별 작품은 그 구조 속에서 과거의 신화와 대화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원형비평이 던지는 질문은 “모든 이야기가 결국 똑같은가”가 아니다.
“서로 다른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왜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이야기처럼 느끼는가”에 더 가깝다.
2026년의 관객은 최신 IMAX 화면 앞에 앉아 있지만 그들이 따라가는 인물은 약 2800년 전부터 바다 위를 떠돌아온 오디세우스다. 기술은 바뀌고 배우와 언어, 화면과 관객은 바뀌었지만 집을 떠나 시련을 겪고 다시 돌아오려는 이야기의 힘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어쩌면 원형이란 같은 이야기가 끝없이 반복된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이 시대가 바뀔 때마다 오래된 이야기에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오디세우스가 아직도 집으로 돌아오고 있는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