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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좋은 작품은 가끔 불친절하다. 우리는 왜 예술에게 쉬운 답을 요구하는가

미술관에서 작품 감상하는 사람
작품 앞에 선 우리는 종종 감상보다 해석을 먼저 찾는다. 예술은 시험지가 아니지만, 우리는 자꾸 정답을 묻는다.[파르트]

미술관에 가면 종종 이상한 장면을 보게 된다. 사람들은 작품 앞에 서 있지만, 정작 오래 바라보는 것은 작품이 아니라 그 옆에 붙은 설명문이다. 캔버스보다 작은 글씨가 더 많은 시선을 붙잡고, 조각보다 해설이 더 큰 권위를 갖는다. 작품을 본 뒤 설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설명을 읽은 뒤에야 작품을 보아도 되는 것처럼 행동한다. 누군가는 작품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말한다. “설명 없으면 아무것도 모르겠네.”

솔직한 말이다. 그리고 우리 대부분의 감상 습관을 드러낸다. 우리는 예술을 만나자마자 묻는다. “이게 무슨 뜻이지?” “작가는 뭘 말하려는 거지?” “왜 이게 중요한 거지?” 질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 질문이 너무 빨리 묻는데 있다. 작품이 우리 안에서 해석되고 이해 되는 시간을 갖기도 전에, 우리는 그것을 해석 가능한 문장으로 바꾸려 한다. 이해되지 않으면 불편하고, 불편하면 곧 실패한 작품이라고 판단하기도 한다.

예술은 언제부터 우리에게 그렇게 친절해야만 했을까.

우리는 많은 것에 친절함을 요구하는 시대를 산다. 앱은 직관적이어야 하고, 영상은 초반 몇 초 안에 흥미를 끌어야 하며, 글은 핵심을 빨리 말해야 한다. 영화는 결말이 명확해야 하고, 음악은 첫 소절부터 귀에 들어와야 하며, 전시는 사진 찍기 좋아야 한다. 복잡한 것은 불편한 것이 되고, 느린 것은 지루한 것이 되며,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불친절한 것으로 분류된다.

그런 감각에 익숙해진 우리는 예술 앞에서도 비슷한 태도를 취한다. 작품이 나를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된다. 나를 헷갈리게 해서도 안 된다. 내가 지불한 시간과 비용만큼 분명한 만족을 얻어야 한다. 미술관 입장권을 샀으니 의미를 받아야 하고, 영화를 봤으니 메시지를 얻어야 하며, 책을 읽었으니 결론을 손에 쥐어야 한다는 관점이다. 예술 감상이 경험이 되기보다 일종의 거래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좋은 예술은 언제나 거래에 순순히 응하지 않는다. 어떤 작품은 설명을 아끼고, 어떤 작품은 관객의 기대를 일부러 비껴가며, 어떤 작품은 뜻을 숨긴 채 침묵한다. 그것은 관객을 무시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관객을 너무 쉽게 소비자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다. 예술이 늘 친절한 안내문처럼 행동한다면, 우리는 작품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정리된 의미를 받아 적는 데 그칠지도 모른다.

마르셀 뒤샹, 〈샘〉, 1917. 변기를 전시장에 놓은 이 작품은 예술의 기준을 뒤흔들며, 오늘도 우리에게 묻는다. “무엇이 예술인가.”[파르트]

마르셀 뒤샹의 〈샘〉은 그런 점에서 여전히 불편한 작품이다. 변기를 전시장에 놓고 제목을 붙인 이 작품 앞에서 사람들은 묻는다. “이게 왜 예술인가?” 이 질문은 백 년이 넘도록 반복되고 있다. 그런데 바로 그 질문이 이 작품은 아직 살아 있게한다. 〈샘〉은 아름다운 형태 혹은 쉬운 형태로로 관람객을 설득하지 않으며, 정교한 소통 기술로 감탄을 끌어내지도 않는다. 대신 그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무엇을 예술이라고 믿고 있었는가?”

이러한 질문은 우리 예술에 대한 고정적 믿음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예술이 손으로 빚은 아름다운 물건이어야 한다고 믿었는가. 작가의 고된 노동이 눈에 보여야 한다고 믿었는가. 전시장에 놓인 것은 특별해야 하고, 일상에서 쓰이는 물건은 예술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는가등이다.

뒤샹의 작품은 우리에게 친절하게 답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가지고 있던 기준을 흔들고 흔들림은 우리를 불쾌함을 느끼게 한다. 우리는 그의 작품을 통해 어쩌면 작품보다 자기 자신의 확신과 마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현대미술이 어렵다는 말은 어느정도 맞는 말이다. 실제로 어떤 작품은 지나치게 폐쇄적이고, 어떤 전시는 관객을 배려하지 않으며, 어떤 작가의 언어는 불필요하게 난해하다. 그렇다고 어려운 것이 곧 깊은 것이 아니며, 불친절하다고 해서 자동으로 훌륭한 예술이 되는 것도 아니다. 허세와 난해함은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

그러나 반대로, 이해하기 쉽다는 이유만으로 좋은 예술이 되는 것도 아니다. 친절함은 미덕일 수 있지만, 예술의 유일한 의무는 아니다. 모든 작품이 우리에게 설명서를 건네야 한다면, 예술은 점점 더 안전하고 예측 가능한 형식으로만 남게 될 것이다. 관객을 당황하게 하지 않는 작품, 해석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 작품, 누구나 바로 이해하고 바로 잊을 수 있는 작품만 살아남는다면, 예술은 우리를 흔드는 힘을 잃는다.

우리가 작품 앞에서 느끼는 불편함은 때로 중요한 신호다. 그것은 작품이 실패했다는 증거가 아니라, 우리가 익숙한 감각의 바깥에 도착했다는 신호일 수 있다. 모르는 언어를 들을 때처럼, 낯선 도시의 길을 잃었을 때처럼, 이해되지 않는 작품 앞에서 우리는 잠시 무력해진다. 그러나 바로 그 무력함 속에서 새로운 감각이 열린다. 내가 알고 있던 아름다움, 내가 믿어온 예술, 내가 편안하게 받아들이던 세계가 전부는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시작된다.

작품 앞에 선 관람객은 때로 작품보다 설명문을 먼저 읽는다. 예술은 언제부터 감상보다 해석을 먼저 요구받게 되었을까.[파르트]

우리는 너무 자주 예술을 정답으로 만들려 한다. 영화의 결말을 해석하고, 그림의 의미를 요약하고, 소설의 주제를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 그렇게 정리된 말은 편리하다. 누군가에게 설명하기도 좋고, 내 감상을 안전하게 포장하기도 좋다. 하지만 예술이 주는 가장 중요한 경험은 때로 정리되지 않는 곳에 있다. 말로 다 옮겨지지 않는 감각, 분명히 느꼈지만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불편함, 시간이 지나도 마음 한구석에 남는 장면 같은 것들 말이다.

작품 앞에서 “모르겠다”고 느끼는 순간을 너무 빨리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모른다는 것은 감상의 실패가 아니라 시작일 수 있다. 문제는 모르는 상태가 아니라, 모르는 상태를 견디지 못하고 곧장 해답을 요구하는 태도다. 우리는 작품에게 너무 빨리 친절을 요구하고, 작품이 침묵하면 쉽게 등을 돌린다. 그러나 어떤 침묵은 무능이 아니라 방식이다. 어떤 난해함은 배제가 아니라 초대다. 다만 그 초대는 빠르게 소비하는 사람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다.

예술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편안한 만족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것은 멈춤이다. 익숙한 판단을 멈추게 하고, 빠른 해석을 멈추게 하고, 내가 이미 알고 있다고 믿었던 세계를 다시 보게 만드는 일. 그래서 어떤 예술 작품은 친절하지 않아도 된다. 너무 빨리 다정해지는 작품은 우리를 변화시키기보다 안심시킬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술 앞에서 조금 천천히 불편함을 즐길 필요가 있다. 예술품 앞에서 설명문을 읽기 전에 한 번 더 바라보고, 의미를 묻기 전에 왜 불편한지 느껴보고,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하기 전에 그 이해되지 않음이 어디에서 오는지 천천히 기다려볼 필요가 있다. 예술은 시험이 아니고, 감상 행위도 정답 맞히기가 아니다.

어쩌면 좋은 작품은 우리의 빨리 지나가려는 마음을 붙잡아 세우는 작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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